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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생명이 내려 앉은 고요한 순간
하나의 생명이 내려 앉은 고요한 순간 ⓒ 안준철
이태 전에 졸업한 제자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저 ○○이에요."
"아이고 내 새끼!"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식의 말투다.

"선생님 내일 학교에 계실 거죠?"
"그럼. 그런데 왜?"

"저 무용 다시 하기로 했어요. 내일 대학원서 쓰러 학교에 가요."
"정말? 아이고 내 새끼!"

나는 언제부터 아이들에게 이런 말투를 쓰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학부형들과 나이가 엇비슷해지면서부터 생긴 버릇이지 싶다. 그것이 벌써 7~8년 전쯤의 일이니 지금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부형이 많아야 서너 명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과 이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선생님이 너희들 아빠지 뭐."
"아빠는 무슨? 할아버지죠."

"뭐? 너 이리와."
"맞잖아요. 할아버지. 우리 아빤 아직 탱탱해요."

언젠가는 아내와 저녁산책을 하고 돌아오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모차를 탄 갓난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먹빛 눈망울에 한참동안 내 시선이 고정되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신성함이 느껴졌다. 아내가 내 팔을 잡아채고서야 아이에게서 눈을 거둘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아들보다 손자가 더 예쁘다는데 당신도 할아버지 다 됐나 보네."

그 말에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그럴 수만 있다면 10년 정도 세월을 확 앞당겨서 하루빨리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세상의 어떤 즐거운 일도 한 아이의 순진무구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덜 즐거울 것 같았다.

사진기에 잡힌 것은 하늘다람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었다.
사진기에 잡힌 것은 하늘다람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었다. ⓒ 안준철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눈을 자주 들여다본다. 출석을 부를 때면 꼭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눈을 맞추곤 한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덧씌워지지 않은 아이들의 고유하고 순수한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다. 생명은 동일하다. 높낮이가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아이들을 차별하는 나쁜 버릇을 갖지 않게 되었다.

요즘은 나이를 먹는 것이 그다지 두렵지 않다. 좀더 세월이 흘러 아이들로부터 정말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이 세상에 한 아이의 생명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즐거울 것이 없는 선생이 될 수만 있다면 교사로서 이보다 더 복된 일도 없을 것 같아서다. 말하자면 나이의 축복이랄까.

최근 엽기적인(?) 수준의 무리한 체벌이나 이런 저런 불미스런 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사들이 대부분 50대라는 뉴스를 접하고 기분이 우울했던 적이 있다. 왜 하필 50대인가? 그것은 교직, 혹은 삶 자체에 대한 새로움을 상실한 세대의 일종의 매너리즘에서 기인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교직생활이라는 것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던가. 그것은 누구라도 선뜻 장담할 수 없는 세월의 덫일 수 있다.

우산 속의 두 아이-얼굴 모양은 다르지만 생명은 동일하다
우산 속의 두 아이-얼굴 모양은 다르지만 생명은 동일하다 ⓒ 안준철
그런데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나는 요즘에서야 아이들 만나는 일이 조금씩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에 비해 조금씩 오류를 범하지 않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 정년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는데 이제야 겨우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지루하다니,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라니? 하루하루가 너무도 생생한 체험 속에서 지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희열과 행복감 속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일까?

아이들을 집단 속의 개인이 아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면서부터 생긴 변화이지 싶다. 내가 교직에 있는 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팔고 싶지 않은 나의 소중한 재산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것도 나이가 준 선물이다.

덧붙이는 글 | <좋은생각>에 기고한 글에 조금 내용을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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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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