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재산환수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친일청산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친일파 재산 환수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친일파 후손들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무시하기 힘든 경제·사회적 권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재산환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반격에 대비하는 준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처럼 그들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 후손들의 반격에 대비한 사회적 면역력을 기르지 않으면 지금 같은 소중한 기회를 지키기 힘들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50년 전 해방 공간에서 그들의 조상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 하는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들이 반민특위를 전복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본 뒤에, 이러한 사실관계를 기초로 친일파들의 주요한 특징을 분석해 보겠다.
물론 친일파 후손들이 50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취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50년 전 친일파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기본적 행위 유형을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
1단계 - 관망
제헌국회가 헌법에 친일처벌 조항을 규정하고, 1948년 8월 5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할 때만 해도 친일파들의 공개적인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들이 보인 행동 패턴은 '관망'이었다.
초기에 그들이 관망의 태도를 보이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던 데에는 대체로 3가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당시 상황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였다. 민족적 대의명분하에 진행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둘째, 1948년 8월 초순만 해도 처벌 대상인 친일파의 범주나 처벌 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어느 수준까지를 친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일단 지켜보자"는 태도를 보였다.
셋째, 당시 여러 가지 국정 현안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각 정치세력이 친일문제에 주의를 집중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친일 청산작업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급한 현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기 집단의 정치적 역량을 친일 문제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2단계 - 내부 단결
1948년 8월 17일 제42차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안(이하 '반민법')이 상정되었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20일 김인식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제의했다.
반민법의 윤곽이 드러나자, 상황의 추이를 관망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처지를 밝혔다. 한민당 역시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확대하고 과도하게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고 밝혔다.
친일청산이 대의명분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노골적으로 반대 뜻을 표명하지는 못하고, 이처럼 그 부작용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제동을 걸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이승만의 반대 표명에도 김인식 의원의 제안을 가결했다. '정부 내 친일파 숙청안'이 가결됨에 따라 국회에서는 김인식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회특별조사위원회(이하 '국회특위')가 구성되었다. 가결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윤치영(내무장관)을 불러 대책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새로 구성된 국회특위에서는 유진오(법제처장)·민희식(교통부장관)·임문항(상공부차관)을 친일파로 지목했다. 민희식·임문항은 자진 사퇴한 반면, 유진오는 이승만의 비호에 힘입어 자리를 고수했다.
한편,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노골적인 목소리가 '독촉국민회'에서 터져 나왔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다.
독촉국민회는 "공산당이 정부 파괴 공작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반민법을 제정하는 것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이적행위이며,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주권을 공고히 세운 후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친일청산을 이적행위로까지 매도했던 것이다.
이때 나온 독촉국민회의의 반공민족주의는 이후 반민특위가 활동할 때에 이승만 측의 반대 논리로 작용했다.
반대 목소리는 공안기구 쪽에서도 나왔다. 검사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사퇴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이보다 더 조직적인 움직임은 경찰에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반민법이 친일 경찰들을 핵심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민법 제정이 확실해진 1948년 8월 24일 김태일 수도경찰청 부청장을 비롯한 과·서장급 간부들이 '민족정기의 앙양'을 명분으로 퇴진을 결의하였다. 한편, 국무총리 이범석은 반민법 문제로 공무원들이 동요를 보이자 공무원들의 행동 자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집단 사직이나 성명서 발표 등은 꼭 친일청산 주도세력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친일파 내부를 단속하고 상호 간의 일체성을 확인하는 모티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초기 행동은 친일파들을 단결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내부적 단결을 강화한 다음에 친일세력은 드디어 외부적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표적은 국회였다. 다음은 3단계 '국회 압박'으로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전복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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