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텔레비전 등 거대 미디어에 크게 영향받는 현시대에도 사색은 여전히 인류의 주요한 덕목이고, 가을은 성찰과 관조로 사람을 유인한다. 높고 푸른 하늘, 따가운 햇볕에 살포시 묻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렇다.
그런 가을의 서정과 똑 닮은 것을 찾는다면 단연 묵향 그윽한 동양 서화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김홍도의 <관산도>가 떠오르는 가을의 초입, 풍부한 서화의 세계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14일부터 예술의 전당 서예관 2, 3층에서 월간 <서예문인화>가 초청하는 서예작가 9인의 개인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아홉 명의 작가 중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가가 있어 전시실을 찾았다. 지난 7월 중국 심양에서 열린 '중국심양국제예술박람회'에 서화 15점을 출품해 대회 최고상인 금장을 수상한 박육철 작가가 주인공.
한자 문화 발상지이자 서화의 중심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의 수상은 국내 서화계의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박육철씨의 작품 중에서 특히 서각(글씨를 나무, 돌 등에 새겨넣는 미술의 한 장르)이 돋보였다. 박씨의 서각은 전통 서각은 아니고 현대 서각이고, 반구상 서각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점은 작가가 선택하는 소재가 깨진 기와, 초벌구이한 흙벽돌, 완성되지 않은 도자 뒷면 등 일상적인 서각 재료인 나무와 돌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재료들에 새긴 작가의 글과 그림은 얼핏 이중섭의 화풍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서민적 소박함이 잘 느껴지는 작품에는 다향(茶香), 다락(茶樂) 등 차에 대한 글이 많이 보였다.
작가 박육철씨는 "서예의 조형성, 재료의 다양성을 결합해 궁극적으로 회화성을 높이면서도 서화의 기본 정신인 여백과 더불어 비백의 맛을 살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비백은 진나라 때의 명필가 왕희지가 즐겨 사용하던 기법으로 글씨의 점획이 까맣게 칠해지지 않고 마치 싸리비 따위로 쓰거나 그린 듯 먹이 듬성듬성 비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현재 한국서각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육철씨는 전남 광양초등학교 교사이기도 하다. 현재 등록된 서각 인구는 대략 1200명 정도. 그러나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인구도 적지 않다고 한다. 예컨대, 산중 스님들이 정진 도구이자, 여가 거리로 서예, 서각을 즐기고 있다.
박씨 자신이 서예, 서각 작가이기에 지난 8년 동안 광양 지역 두 곳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서예를 지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서예관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맞은 편에 있다. 이번 전시회의 관람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