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행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이란 말이 통용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 아무도 바라보는 이가 없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몰랐다'는 말로 대신하고 마는 그 고즈넉한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행복이란 빛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선인장을 품에 가득 안고 흘리는 눈물처럼 고통이 올 것을 알았지만, 사랑도 행복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다. 삶과 죽음. 그 아련한 간극 속에 '진짜 행복'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죽음을 원하던 두 사람, 사랑을 갈구하다
'쓰레기 같은 30분'의 연속이 삶의 전부였던 여자, 문유정. 삶의 마지막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형수 정윤수. 환경에서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다른 그 두 사람에겐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모태가 그들을 엮어 주고 있었다. 둘은 모두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삶을 살기보다는 죽음에 당도하기를 원했다.
유정에겐 어린 시절부터 가슴 깊은 '한'으로 내재되었던 상처가 죽음을 원하는 이유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도 치유해주려고 하지 않았던,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정조차 해주지 않았던 그 상처로 인해 스스로 죽음을 세 번이나 택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살인이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 없듯, 죽음에 관해서도 본인의 허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만든 것도 본인이 아니기에, 강제로 자신을 해하는 것 자체가 살인이라고 말했다. 유정은 그 살인을 세 번이나 저지른 살인자, 아니 살인 미수자였던 것이다.
윤수는 삶은 있지만, 인생은 없었다. 숨통이 붙어있기는 했으나, 부모도, 형제도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몹쓸 가난과 지독한 고독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희망이 없던 그의 인생은 차라리 죽음이 더 행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낄 만큼 아무런 삶의 의지를 갖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죽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더 잘 살기를' 바랐다. 그것은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아니라, 살고 싶어 사는 인생을 영위하고자 했던 본심이다. 상처로 인해 제대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유정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여유조차 없던 윤수도. 그네들은 누구나처럼 따뜻한 관심과 애정 어린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소설은 계속해서 우리가 몰랐다고 단언한 채, 고개를 돌렸던 많은 세상 속의 어둠에 대한 반증을 제시했다. 몰랐다는 말로는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죽음보다 못한 삶에 대한 방치는 살인을 부추기는 꼴이었으리라.
… 은수는 그걸 사절까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추운 밤, 애국가를 부르면서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차가운 팝콘처럼 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은수는 노래가 끝나자 웃으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형,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애 ……. - 블루노트 08 중
작가는 독자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동시에 우리 사회에 소리쳤다. 그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중략)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모른다'는 말로 지나치고 말았을, 몰라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참회하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 삶과 상처를 딛고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하는 용서를 하려는 사람들, 남을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 자신의 처지에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분들과 함께 나는 김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이하 생략)"고 말한 것이다.
우리들의 '진짜' 행복한 시간
소설은 유정에게 엄마를 주지 않았다. 엄마가 있었지만, 그녀의 엄마는 한낱, '부재'를 상징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윤수의 가족들은 죽거나, 인생의 끝자락에 치매에 걸린 모습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행복을 배웠다. 행복은 그저 살고자 하는 마음이요, 나누고자 하는 사랑이었음을.
두 사람은 '진짜'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소통을 시작했다. 번법의 잣대에 한 발 자국만 다가서면,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고, 또 조금만 더 착하게, 혹은 위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나름대로 충분한 인생을 부여받는 것이 사람이다.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그렇기에 죽음을 앞에 둔 채로 삶에 대한 용서를 말하고자 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명언들은 소설의 이해를 돕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소설이 주는 감동보다 더한 세레카의 명언이 이 세상 모든 부재에 허덕이는 사람을 위해, 죽음에 대한 탄원을 재기하는 이들을 위해 말한다.
신비롭게도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더더욱 신비롭게도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 데 또 일생이 걸린다. -세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