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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언론회동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美대통령이 15일 새벽(한국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언론회동을 하고 있다.
한미 정상 언론회동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美대통령이 15일 새벽(한국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언론회동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창기

지난 14일(현지 시각)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에는 변함이 없고,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정치화 되어서는 안 되며, 환수 시기는 양국 국방장관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작권 환수와 관련, 한국 내 논란을 잘 알고 있었던 듯 핵심을 얘기했다. 모두 보수 진영이 전작권 환수로 인해 발생할 문제라고 비판했던 것들이다. 부시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은 전작권 환수 반대 500만명 서명운동을 지속할 생각이다. 한나라당도 2차 방미단을 보낸다. 미국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될 것이다.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은 이제까지 '미국과 의견이 다른 것=반미'라는 등식을 주장해왔다. 따라서 현재 미국과 의견이 다른 한나라당은 '반미'가 될 수밖에 없다. 부부 사이에도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이혼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 정도 생각만 했더라도 보수진영은 자승자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수들의 반미, 아이러니 하네

사실 더 문제는 역대 보수 정권들이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뒤흔들릴 정도로 미국과 충돌한 적이 많았음에도 자신들의 과거는 까맣게 잊고 '반미 장사'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휴전에 반대하며 단독 북진 통일을 고집했다. 그는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빼낼 생각까지 했다. 미국은 골칫덩어리인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 '에버레디 계획'을 세웠다. 보수진영이 '건국의 아버지'라고 떠받드는 이 대통령이 제거 대상이 됐을 정도로 한미 동맹이 악화됐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는 '한미 갈등의 10년'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69년 3월 주한 미군 2만명 철수계획을 세우고 1970년 7월 6일 박정희 정부에 정식 통보했다. 한국과 전혀 사전 협의가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군 철수 반대 국회결의', '내각 총사퇴'라는 배수진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5000여명 전사했다. 이렇게 혈맹의 도를 다했는데 일방적으로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했다면 대체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어떻게 관리했던 것인가?

박 대통령 시절 미국과의 갈등은 '코리아게이트'가 일어날 정도로 유명했다. 1970년대말에는 미 CIA에 의한 청와대 도청설이 퍼지면서 관제 반미데모가 벌어졌다.

만약 김대중 정부나 현 정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보수 언론들은 "대체 미국이 얼마나 한국을 불신했으면 청와대를 도청했을까"라고 기사를 썼을 것이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지미 카터 행정부와 박 대통령의 충돌은 거의 뒷골목 싸움판 수준이었다. 오죽했으면 1979년 10·26 사태가 나자 시중에는 "CIA가 김재규를 사주해 미국 말을 안 듣던 박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까.

북한 문제를 둘러싼 김영삼 정부와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갈등도 대단했다.

미 국무부 통역관으로 20여년간 일했던 김동현(미국명 통 김)씨가 지난 2005년 11월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강연에서 밝힌 비화가 잘 보여준다. 김씨는 로널드 레이건부터 현 부시까지 4명의 미국 대통령 통역을 맡았다.

김씨에 따르면,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이 벌어진 뒤 YS는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면 북한 일부 지역을 공격하기로 하고 타격 목표물까지 선정했다. 그러나 YS는 이런 대북군사 행동계획에 대한 미국과의 사전 협의를 거부했다. 당시 미 국무·국방장관은 물론 CIA 국장까지 나서 설득했으나 한국 정부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격분한 클린턴 대통령이 그 해 11월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APEC) 정상회의 때 '한미 동맹의 성격이 변한 것이냐'고 압박했고 "그제야 바라던 대답을 YS로부터 받아냈다"고 김씨는 전했다. 김씨는 "(YS 정부의 이런 태도 때문에) 대북 연합 방위태세에 정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었다"고 회고했다.

김동현씨는 지난 2005년 6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과정에서 북·미에 따돌림당한 YS가 클린턴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무슨 동맹이 이런 게 있노'라면서 화를 냈다"며 "당시 한국 측 통역이 당황해 YS의 말을 장황하게 다른 말로 바꿔 설명하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이렇게 한미 연합작전체계를 동네 친목계 규약보다 우습게 알았던 YS가 "한미 연합방위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1994년 6월 미국의 단독 (군사) 행동을 막을 수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반미 때문에 한미동맹이 망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미국과 의견이 다른 것=반미'라는 등식만 아니라면 보수 진영이 "우리는 무조건 친미가 아니라 필요할 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용미(用美)"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됐을 텐데 아쉽다.

전작권 환수 반대, 의병 10명으로 될 일인가

지난 14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시작전통제권 논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 14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시작전통제권 논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13일 밤 한나라당 의원 10여명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환수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며 국회에서 집단농성에 들어가자 강재섭 대표는 "당내에 의병이 일어났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턱없이 약하다.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다는데 겨우 10여명 의병이라니?

미 7사단 철수를 막기위해 박정희 정권은 내각 총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다. 유감스럽게도 한나라당은 집권당이 아니니 사퇴할 내각 자리가 없다. 그러나 이와 맞먹는 위력을 가진 카드가 있다. 바로 의원직 총사퇴 선언이다.

단, 박 정권의 내각 총사퇴 배수진에도 미 7사단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한국을 떠났던 역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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