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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이기원
다래를 먹어보신 적 있나요?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고려시대 농민들이 머루와 함께 먹으며 회한을 달랬다고 하는 다래가 강원도 원주천 둔치의 새벽시장에 나왔습니다. 말랑말랑한 다래 입에 넣고 씹으면, 달콤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스며듭니다. 참다래도 키위도 있지만, 산에서 직접 따다 새벽시장에서 파는 다래 맛을 따를 수야 없지요.

ⓒ 이기원
달콤새콤하기로 따지면 꽈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면 할머니는 '약에 쓴다'며 꽈리를 따서 실에 꿰어 벽장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꽈리가 할머니 뜻대로 제대로 약으로 쓰였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할머니 눈을 피해 벽장에 올라가 하나씩 둘씩 알맹이만 빼서 먹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찬바람이 불고 누군가가 감기라도 걸려 목이 부으면 할머니는 벽장에 걸어둔 꽈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꽈리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누구의 짓인지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불러 야단치는 대신 손자 녀석 앞에 두고 들으라는 듯 한마디 하셨습니다.

"집안에 인쥐를 키우나 부다."

그땐 '인쥐'가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꽈리를 모두 먹어치워 할 말이 없는 나는 모른 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나이가 들고 보니 인쥐란 사람쥐란 뜻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인쥐 같은 손자 녀석의 못된 손버릇에 대해 한 번도 야단을 친 적이 없는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 이기원
"할머니, 이 빨간 열매가 뭐지요?"
"오미자래요."
"아, 오미자."

다섯 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오미자라고 부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직접 오미자를 본 적은 처음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제법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새벽시장에서 선홍빛 오미자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이건 어떻게 먹어요?"
"물 넣고, 꿀 넣고, 재워두었다가 먹기도 하고, 물에 담가 우려내서 먹기도 해요."

ⓒ 이기원
박도 보였습니다. 가을밤 초가집 지붕 위에서 하얀 달처럼 익어가던 박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는 플라스틱 바가지에 밀려 잘 여문 박을 톱으로 잘라 속을 파내어 만든 바가지는 볼 수 없습니다. 초가집 지붕 위에서 어둠을 하얗게 밝혀주며 익어가던 박에 얽힌 기억도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 이기원
"이거 햇밤이에요?"
"그럼, 햇밤이지. 추석이 낼 모렌데."

탐스럽게 생긴 알밤도 나왔습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알밤 껍질을 벗겨 아드득 씹어 먹으면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찬이슬 내린 새벽에 밤나무 숲으로 가면 이슬에 촉촉이 젖은 빨간 알밤이 풀숲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지요. 주워 모은 밤을 삶아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 이기원
밤 얘기하면서 고구마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구마 중에 제일 맛있는 고구마를 '밤고구마'라고 합니다. 겨울 방 윗목에는 싸리로 엮어 만든 고구마 저장고가 있었습니다. 화로에 구워 먹기도 하고, 솥에 삶아 먹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고구마 섞은 밥도 해먹었습니다.

그중에 최고의 맛은 화로에 넣어 노릇노릇 구워 먹는 군고구마였습니다. 뜨거운 군고구마 호호 불며 먹다 보면 문풍지 틈새로 스며들던 매운 추위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 이기원
ⓒ 이기원
ⓒ 이기원
사과도 있고 배도 있습니다. 토마토도 있고 복숭아도 있습니다. 애지중지 키운 농산물만 파는 게 아닙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거친 숨 몰아쉬고 비지땀 흘린 노고를 얹어 파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둔 돈으로 추석도 준비하고 겨울날 준비도 해야 합니다.

ⓒ 이기원
새벽시장의 가을이 깊어갑니다. 깊어가는 새벽시장의 가을과 함께 추억도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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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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