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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정말 유리알처럼 투명합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올 것처럼 보입니다. 들판엔 이미 가을의 이미지가 파스텔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벌써 단풍구경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어느새 둥지를 떠난 뻐꾸기 소리가 처마 밑에서 들리는 계절입니다. 먼 산에서는 흰 구름이 멈칫멈칫하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세월을 내려놓듯 한 잎 두 잎 땅바닥에 부려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월은 가나 봅니다. 조용히, 조용히 추억만 남겨놓고 갑니다.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가 한창입니다.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이 아름다운 경쟁을 펼칩니다. 옛날엔 운동회가 대단한 볼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에 비해 시시해진 느낌입니다.
30년 전 운동회를 떠올려봅니다. 그 때는 지역의 잔치였습니다. 면 단위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였지요) 운동회는 동네잔치이자 가족잔치였습니다. 바쁜 가을 일손을 놓고 온 가족이 자식과 손주의 운동회를 찾아, 응원하고 구경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인 셈입니다. 가족이 다 모이면 온 동네잔치가 됩니다. 마을에는 강아지들만 남아, 길가에 말리고 있는 붉은 고추를 지킵니다.
만국기가 내걸린 운동장 모퉁이에 걸어놓은 검은 무쇠 솥단지에서는 돼지고기 국이 펄펄 끓고 옆에 있는 솥단지에서는 오랜만에 맛보는 흰쌀밥이 구수한 내음을 짙게 풍깁니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동네잔치가 됩니다. 어르신네들은 걸쭉한 막걸리 한 잔에 절로 신바람이 났고, 옥수수며 고구마며 햇밤들이 넘쳐났습니다. 참으로 풍족한 하루였습니다.
아이들도 매스게임이나 아슬아슬한 '피라미드 쌓기' 같은 집단체조 실력을 뽐냅니다. 한 달 전부터 연습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고학년 선배들을 보면서 넋이 나갔던 후배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기마전 경기가 열리는 순간, 청군과 백군 사이에 긴장감이 감돕니다. 옷이 찢어지고 얼굴에서 피가 나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 한국인의 끈기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용돈 좀 벌자고 자기 등치보다도 더 큰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아이스케키! 얼음과자!"를 연신 외치던 아이들이 운동회의 흥을 돋우었던 옛날의 운동회는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 자꾸 옛날을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람은 역시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인가 봅니다. 슬러시(잘게 간 얼음을 넣은 음료수)나 장난감 장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요즘 운동회를 보면, 말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추억의 놀이가 되어버린 기마전과 공굴리기, 콩주머니로 소쿠리 터뜨리기, 줄다리기, 매스게임 등이 옛날 운동회의 주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시간 때문일 것입니다. 학원도 가야 하고 과외도 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거의 한 달 동안 운동회 연습을 했습니다.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운동회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도 연습량이 많은 만큼 운동회에 대한 기대가 컸고, 부모님들도 자식들의 대견한 모습을 보고 흡족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 운동회를 그 때와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넓은 운동장에 사람이 많은 것은 비슷한데, 요즈음엔 어머니와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아버지는 직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이 빠진 요즈음 운동회는 다소 김이 빠진 느낌입니다.
작은 운동장에 아이들만 북적북적한 요즈음 운동회는 번거롭고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아니, 통과의례처럼 보입니다. 형식적인 행사에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100m달리기도, 곤봉 매스게임도 예전처럼 억척스러움과 세련미가 부족합니다. 프로그램을 쫓기듯 진행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학생들이 많은 탓일 것입니다.
아들 현진이 운동회 때 김밥도 싸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점심을 양식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변하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요즈음 아이들은 양식을 더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부러워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현진이를 보니, 낭만도 이렇게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자꾸 내 생각의 꼬리를 붙잡는 것을 보면 아쉽긴 아쉽나 봅니다. 아니면, 아직도 추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한 아이로 내가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노태영 기자는 남성고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