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①
"미국이 전시 작전통제권을 넘기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주한미군처럼 어느 한 곳에 군대를 붙박이로 박아두기 어려운 입장이다. 군사전략 변화와 첨단 군사기술의 발달로 군대도 해·공군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를 원하는 미국 입장에서 전시 작전통제권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유사시 미군 사령관이 한국 방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 현재의 한미연합사 체제·작전계획 5027·시차별 부대전개 목록(유사시 미 증원군 투입 계획)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이 원하는 변화는 추진하기 어렵다. 미국은 그래서 전작권을 넘기기로 한 것이다."
글 ②
"미국이 침략을 받지 않는 경우에 주한미군을 한반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한·미 합의시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신'으로만 하기보다는 '문자와 정신'으로 엄격히 하는 것이 더 낫다."
위 두 글의 근본 내용이 다르다고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첫번째 글의 초점은 전시 작전통제권에, 두번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핵심은 전략적 유연성이다.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주한미군은 동북아 기동군으로 역할을 바꿔 대만해협을 비롯한 해외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고 더 이상 대북 억지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미연합사라는 거추장스러운 틀은 필요없다.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는 그 적용 범위를 '대한민국 영토'로 한정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에 위배된다. 또 미군의 군사행동 개시 요건을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이 있을 경우'로 한정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와도 어긋난다.
전략적 유연성은 '동북아 기동군'으로 하드웨어가 업그레이드된 주한미군을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였다. 이제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어서 더 말하는 것이 입이 아플 지경이다.
<조선일보>와 NSC가 함께 걱정한 것은
그런데 위 두 글을 누가 썼을까? 첫번째는 <조선일보> 양상훈 정치부장이 지난 20일 쓴 '기가 막힐 일'이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두번째는 올 2월1일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공개한 2005년 12월 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록(3급 기밀)에 들어있던 내용이다.
당시 NSC 상임위 회의 때 조영택 국무조정실장이 "전략적 유연성 인정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라고 묻자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이 침략을 받지 않은 경우에 주한미군을 한반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음. 이와 관련, 외교부 조약국은 한·미 합의시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고 함. 따라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정신'으로만 하기보다는 '문자와 정신'으로 엄격히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함. 그러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서 절충한 것이 현재의 ③항임."
또 이런 문장도 있다.
"우리측이 제시한 3개 기본개념 중 '①전략적 유연성'과 '② 동북아 분쟁 불개입'에 대해서는 미측과 합의를 보았으나, 셋째('③사전협의')는 미결 상황임. 우리측은 ③과 관련 향후 상황 도래시 논의하자는 입장임. 따라서 가능하다면 '제2안 : 공동성명 I'로 가는 것이 바람직함."
주한미군의 해외출동시 사전 협의 조항을 넣어야하는데도 그냥 생략해버렸다는 것이다.
현재 보수진영은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한미연합사 해체로 주한미군이 한반도 유사시에도 다른 곳에 출동할 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있다. 사전 협의만 명문화했어도 그들의 공포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 8개월 전에는 국가 기밀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내용이 공개됐을 때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해보자.
전략적유연성이 한반도 안보 상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커녕 '국가 기밀 유출'이라는 마녀사냥만 벌어졌다. 마녀사냥에는 야당과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청와대와 여당까지 가세했다. 문건을 건네 준 '딥 스로트'가 누구냐는 식의 첩보영화식 시나리오만 난무했다.
올 2월 4일 <중앙일보>의 '외교기밀 정략적 이용 안 된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문제는 왜 외교적 기밀 내용이 담겨 있는 문건이 연일 폭로되고 있느냐는 점이다. 한·미 간에 합의한 '전략적 유연성'은 한국의 상황을 감안할 때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만 하면 양국의 입장이 균형적으로 반영됐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렇게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을 '폭로'라는 형식을 통해 문제화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전략적 유연성'에 불만을 품은 강경 좌파세력의 뒤집기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언론과 정치권이 너무나 떠들어서 이제는 초등학생도 알게된 전략적 유연성의 의미가 불과 8개월 전에는 '국가 기밀'이었다니 <조선> 정치부장의 칼럼 제목대로 '정말 기가 막힐 일'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일부 군 고위급 장성출신 인사들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작계 5027의 내용을 제멋대로 떠들어 1급 군사기밀이 유출되는 어어없는 일이 한낮에 벌어지는 나라에서 말이다.
2월 22일 청와대는 NSC 문건을 유출한 범인을 잡았다고 공개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 파견나가있던 이종헌 행정관이었다.
또 보수언론의 난타가 이어졌다.
'서울법대 출신인 이 행정관은 지난 대선 때 노사모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공무원 신분을 망각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해 구설수에 올랐다. 외교부 '자주파 탈레반' 3인방의 하나였고, 2월 6일 인사청문회를 앞둔 이종석 통일부 장관을 낙마시키기 위해 문건을 공개했다' 라는 것이었다.
어제의 '자주파 괴수'가 오늘의 '온건파'
마녀사냥의 백미는 이전까지 보수언론에 의해 '자주파의 괴수' 자리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차지하고 있던 이종석 장관이 한순간에 '온건파'로 강등되고 이 행정관이 '강경 자주파'로 '옹립'된 것이었다.
<조선>이 2월3일 '외교기밀 폭로 파문 권력내부 힘겨루기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강성 반미 자주파가 온건 자주파 공격"이라고 기사를 쓴 뒤 다른 언론들이 모두 이 기조를 따라갔다.
정부의 '반미 행동'은 모두 이종석 장관이 배후라고 기사를 써왔다가 NSC 문건 내용을 보니 말문이 막힌 보수언론들이 '강경 자주파'와 '온건 자주파'라는 신조어를 들고나온 것은 '정말 기가 막히는 말 장난'이었다.
NSC 문건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전략적유연성의 문제점은 눈도 돌리지 않고 청와대 내부의 대형 화재(자주파-온건파의 대립)에 부채질하는 재미에 푹 빠졌던 보수진영이 이제와서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전작권 환수 반대'를 목터지게 외치는 모습은 '웃찾사' 저리 가라다.
이 행정관을 비롯한 청와대 안의 '진짜 자주파'들은 지난 2003년 용산미군기지 이전 때부터 한미동맹 재조정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들은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GPR)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용산미군기지의 오산·평택으로의 이전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미군의 필요에 의한 용산기지 이전인 만큼 이를 협상 전략으로 활용해 한국이 전액 이전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반환되는 주한 미군 기지의 환경 치유는 미군의 책임지도록 법적 절차를 분명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다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들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 행정관이 최 의원에게 건네준 문건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당시 여당의 제1 정조위원장을 맡고 있던 최 의원을 통해 최소한 전략적유연성의 심각성에 대해 당정 협의라도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국가 안보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초당적 차원에서 야당에도 미리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라는 뜻이었다.
정직 3개월, 그의 죄는 무엇인가
이 행정관은 기밀 유출 혐의로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전작권 환수 문제로 나라가 뒤흔들릴 지경인 지금, 이른바 NSC 문건 유출 뒤 8개월만에 온 국민이 알게된 내용, 그것도 반드시 국민들이 알았어야 할 내용을 공개한 것이 죄인지 아니면 이런 심각한 사안을 기밀로 분류해 밀실에서 적당히 처리하려했던 사람들이 죄를 저지른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기밀 유출'이니 '자주파와 동맹파의 싸움'이니 하면서 엉뚱하게 사태를 몰고갔던 보수 진영과 언론들도 최소 공범죄를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행정관이 '범인'으로 잡히던 날 최재천 의원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 갈릴레오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녀사냥이라는 분탕질 속에서도 지구는 계속 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