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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전 '한 과장' 한영수와 그의 아내, 송은영.
ⓒ 송성영
얼마 전 석유 관련 회사에 다니던 한영수(43) 과장이 사표를 던졌습니다. 1년 전부터 벼르던 사표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는 '한 과장'이 아닙니다. 그냥 '지원이 아빠'입니다. 나는 지원이 아빠, 한영수씨를 '한 서방'이라고 부릅니다. 여동생 송은영의 남편, 내게 있어서는 매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표낸 지 20일쯤 지난 며칠 전, 대전에 사는 한서방네 부부가 우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인저 재밌지, 사는 게?"
"그럼요, 요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
"요즘 빨래하고 밥해놓고 기다린다니까. 어제는 이불까지 꼬메 놓았더라고. 지원이 아빠 사표 낸 덕분에 내 팔자가 폈다니께."

언제나 세상을 겁없이 받아들이는 여동생, 송은영은 태평입니다. 남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남편이 직장 때려치운 것에 대해 '위로의 전화'까지 해주고 있는데 오히려 남편의 사표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한 서방네, 꿍쳐둔 재산 있어?

한서방이 사표를 내겠다고 작심할 때도 그랬습니다. 울고불고 난리친 것이 아니라 되려 남편의 사표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에 아빠로 한눈 팔지 않고 살았으니 이제 한영수 자신의 삶을 살아야지. 그래야 옆에 있는 나도 편하고. 남편이 괴로워하는데 가족들이 어떻게 편할 수 있겠어?"

'한서방네가 평생 먹을 만큼 꿍쳐 둔 재산이 있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맞벌이로 결혼 생활 15년 동안 모은 재산은 대전 변두리에 자리한 아담한 집 한 채가 전부입니다. 몇년 전 은행 빚으로 장만한 집이었는데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다가 이번에 퇴직금을 몽땅 쏟아 부으면 온전히 제 집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제 형님처럼 적게 벌어서 적게 먹고 살믄 되겠지요."

사실 한 서방은 거의 땡전 한 푼 없다시피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얼마간의 집안 빚까지 짊어지고 신혼살림을 했습니다.

우리 형제들 대부분은 결혼을 반대했지요. 땡전 한 푼 없고 시부모까지 모셔야 할 궁색한 집안에 여동생이 시집가는데, 좋아라 할 사람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좋다면 무조건 좋다고 찬성했습니다. 당시 산 생활을 하면서 똥폼 잡고 '마음 비우기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였기에 선뜻 찬성표를 던졌는지도 모릅니다.

10년 열애한 한영수와 송은영

▲ '한 과장' 한영수의 아내 송은영(44)은 내 여동생이다.
ⓒ 송성영
내가 두 사람의 결혼을 환영한 가장 큰 이유는 한영수가 송은영을 무지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녀가 만나 사는 데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한영수와 송은영은 결혼하기 전까지, 흔치 않은 10년이 넘는 연애 기간을 거쳤습니다. 둘이 교제를 시작하던 시절, 송은영이 한동안 한영수를 만나주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크지 않은 키에 까무잡잡한 외모의 한영수가 볼품없는 남자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신보다 한 살 더 어렸으니 그게 좀 부담이 됐던 모양입니다. 영화배우 같은 남자와 사귀고 싶어하는 스물두어 살 무렵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아니, 또 모르죠. 내가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는.

어쨌든 '사랑하는 은영씨'가 만나 주지 않자 일편단심 영수는 다니던 대학에 휴학계를 던져놓고 탄광촌을 찾아들기도 했답니다.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었냐구요?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나 나이 따위를 초월하는 영수씨의 진실된 사랑을 느끼게 거죠.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고 세상만사 다 포기한 남자를 보면서 '저 남자가 나를 진짜로 사랑하는구나', 뭐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한영수는 그 후로도 '사랑하는 여자 은영씨'를 위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나는 이미 여동생에 대해 일편단심인 한영수를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흔쾌히 찬성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한 과장, 정말 잘나가는 사람이었죠

마찬가지로 이번에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역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흔히들 요즘처럼 직장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 누군가 뜬금없이 사표를 던지면 뭔 사고를 쳤겠지, 아니면 "더럽고 치사해서…" "한창 잘 나가던 사람이…" 어쩌구 저쩌구들 말들이 많습니다.

한 과장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한 과장이야말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사표를 내기 전 팀장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몇 개월만 지나면 부장급이나 다름없다는 팀장으로 승진할 호기를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과장은 고지식할 정도로 부당한 일에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짜 석유가 판칠 때는 라디오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와 석유품질에 관련된 코멘트를 할 정도로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사표를 내기 바로 전까지 '근로자 대표 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직장 동료로부터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사표를 던졌으니 직장동료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던 '계급 높은 간부'들까지 아쉬움을 표시하고 사표를 말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표가 수리될 때까지 그는 아예 휴대전화기이며 집 전화까지 단절하고 있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앞으로 불어 닥칠 생활고를 별 걱정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여동생은 '허허실실' 남편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능력있는 남편의 사표를 아쉬워하는 글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다는 것입니다.

15년 주말부부 생활, 드디어 청산

▲ '한영수'와 '송은영'의 두 딸내미 지원이와 채원이. 녀석들은 사랑스런 내 조카들이다.
ⓒ 송성영
그렇다면 한 과장은 무엇 때문에 왜 사표를 낸 것일까? 그는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지요."

그는 직장 생활 15년 동안, 거의 반을 부산 근교와 서울 근교에 있는 본사를 오가며 주말 부부로 보내야 했습니다. 사표를 내기 전까지도 경기도 성남시 분당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올해 중학생이 된 지원이와 초등학교 3학년인 채원이, 두 딸이 있습니다.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일주일에 고작 한 번씩 만나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찾아오지만 그나마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요령 피우지 않고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려 생활하였으니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게 마련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정을 꾸렸는데 정작 그 시간을 직장에 헌납하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동생 말로는 직장에서는 능력있는 그를 잡아두기 위해 그가 평소 원했던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끝내 사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까요?

그렇다면, 한 과장, 아니 지원이 아빠, 한 서방은 도대체 앞으로 뭘 해서 어떻게 먹고 살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그의 대답은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일단은 그냥 음악을 들어가며 아무 생각 없이 쉴래요."

한 서방은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요즘 날마다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그를 보면 그동안 정신적으로 큰 병을 앓았던 사람 같습니다. 무슨 병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가 이제야 그 병의 실체를 알고 가족이라는 병원에 입원해 완치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 병에는 약이 따로 없습니다.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은 한동안 잃어 버리고 살았던 '가족의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고 뭐고 현실적으로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해결할 작정이냐고요?

사랑이 충족되면 어떤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본래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한 '한영수' 였잖습니까? 오로지 '사랑' 하나로 아내와 두 딸, 거기에 덤으로 집 한 채까지 장만했는데 앞으로 뭔 걱정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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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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