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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리영희 선생은 변함없는 사회과학자였다. 선생은 말 하나도 글을 쓰듯 신중하게 한 마디 한마디를 아꼈다.
역시 리영희 선생은 변함없는 사회과학자였다. 선생은 말 하나도 글을 쓰듯 신중하게 한 마디 한마디를 아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리영희 선생이 평생 쓰신 글들이 한길사에서 12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리영희 선생은 18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리영희 저작집> 출판기념회에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해 참가자들을 일일이 반겼다. 이틀 뒤, 연희동 아드님댁에서 리영희 선생을 다시 만났다. 댁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은 점심 중이었다.

대신 사모님이 우리를 뜰로 안내했고, 강원도에서 직접 땄다는 다래를 내왔다. 강아지 '꾸꾸'가 반갑게 사방을 뛰어다니고 굴러다니는 가운데 카메라를 설치하고 인터뷰 준비를 마치자, 선생께서 오후의 가을햇살 속으로 나오셨다.

역시 리영희 선생은 변함없는 사회과학자였다. 선생은 말 하나도 글을 쓰듯 신중하게 한 마디 한마디를 아꼈다. 확실한 자료와 증거가 없으면 글을 쓰지 않던 분이라, 잘 모르거나 막연하게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분명히 잘라 말했다.

전 장관들의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반대에 대해서는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단호한 어조로 비판했다. 국민의 신뢰도 받지 못한 채 폭력정권에 기대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FTA를 해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구한말의 강대국 의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기상실적 태도"라고 비판했다.

스웨덴 보수당 집권으로 시작된 한국언론의 '복지정책 때리기'에 대해서 "근시안적인 단견"이라고 지적하며, 미국의 텃밭이었던 라틴아메리카가 좌파정권으로 교체되었을 때 한국의 보수언론은 어떻게 반응했었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의 언론은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선전매체'라는 것이 리영희 선생의 평가였다.

한편,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희망과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민주화의 열매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소비문화에 대해서는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리영희 선생은 "검소한 생활, 고귀한 사고"를 젊은이들이 기억해야 할 삶의 철학으로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오마이뉴스> 등의 인터넷 언론을 '구텐베르크시대의 혁명적 전환'으로 평가하면서, 그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감과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고 당부했다.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는 1시간 20분간 이어졌다. 다음은 인터뷰 요약본이다.

"전직 국방부장관들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됐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친 리영희 선생이 난간에 기대어 있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됐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친 리영희 선생이 난간에 기대어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선생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뇌출혈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었지만, 많이 좋아져서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됐어요. 다만, 기억력이나 두뇌활동이 현저히 감퇴한 것 같아. 이것은 할 수 없지. 뇌 세포가 많이 죽었으니까. 손이 굳어지고 떨리는 게 문제인데, 이것은 잘 낫지 않아. 아마 낫지 않을 거야."

- 평생 글을 써 오셨습니다. 얼마 전 글을 그만 쓰겠다고 선언하시면서 마음이 어떠셨는지요? 서운한 마음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서운하기보다는 현명한 결단을 했다는 생각이 커요. 더는 연구를 할 능력이 없어. 나는 막연하게 이념이나 이론조작이 아닌, 엄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 우선 찾아야 하고, 읽어야 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체계화해서 글을 써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야.

글 하나 쓰기 위해 몇천 페이지를 읽어야 할 때도 있어. 가령 한반도에서 미국군사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회의 비밀문서를 찾아내서 읽어야 해. 현실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간투자와 노력이 필요한데, 이제는 그럴 역량이 없어요."

- 전시 작전통제권을 한국이 되찾아오는 것에 대해 전직 국방부장관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전 국방장관들의 발언과 선생님의 절필 선언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분수를 알면 좋겠어.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요. 그 사람들이 과거의 행적이나, 현직에 있을 때 국민의 신뢰를 얻을만한 판단과 행동을 했었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군사독재와 폭력정권에 빌붙어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들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도 내 분수에 따라서 물러난 것이고."

"한국, 구한말 강대국 의존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 이전에 선생님께서는 미국식 세계화의 확산으로 인해 북유럽의 복지정책마저 축소될 위험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최근 스웨덴의 중도보수연합의 집권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언론은 사민당의 실각을 '스웨덴 복지정책의 실패'로 규정하고 한국에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은 '복지정책'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영국 대처 총리가 80년대 초에 집권했을 때 미국과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전 세계 모두가 우파로 돌아섰다고 주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자 유럽 대다수의 나라에서 좌파정권이 집권했어.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자 한두 나라에서 다시 우파정당이 집권하기 시작했어.

스웨덴 역시 오랫동안 집권하던 좌파정권이 근소한 표차로 보수당에 일시적으로 정권을 내준 것뿐이지, 미국식 자본주의를 신으로 섬기는 한국의 보수언론이 두 손 들고 환호할 만큼 절대적인 표나 의석 차가 아니야. 51대 49 미만의 작은 차이일 뿐, 근본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멀어요.

모든 것은 역사의 흐름이라는 장기적 안목으로 봐야 해요. 한때는 미국의 뒤뜰처럼 미국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던 라틴아메리카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모두 좌파정권으로 돌아섰잖아. 라틴아메리카가 이렇게 바뀌었을 때 한국의 보수언론은 어떻게 반응했지? 한국의 보수언론은 제대로 된 언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선전매체에 지나지 않아요."

"미국에 매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은 한심스러운 자기상실에 지나지 않아."
"미국에 매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은 한심스러운 자기상실에 지나지 않아."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선생님은 오랫동안 중국을 연구해 오신 중국전문가이시기도 합니다. 현 정부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중국의 부상'을 꼽고 있습니다. 중국의 성장이 한국정부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은 일면만을 봐서는 안 돼요. 중국이 강대해지면 미국에 붙어살아야 한다거나, 따라서 미국과 FTA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참 위태로운 생각이야. 이것은 비단 한미자유무역협정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의 기본적 원리야.

구한말을 생각해 보면 잘 알잖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고, 그것도 잘 안 돼 미국을 믿었지만, 미국은 한국을 버리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잖아. 지금 동아시아를 전쟁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누구야?

미국에 매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은 한심스러운 자기상실에 지나지 않아. 이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의 이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지혜를 얻을 때도 됐는데, 우리는 여전히 100년 전에 가졌던 강대국 의존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순간'에 집착하지 말고 길게 보아야"

- 선생님께서는 '지식인은 자기 신념대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신 순간이 있는지요?
"나는 '순간'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모든 것은 길게 봐야지. 근시안적으로, 미시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돼요. 스웨덴 정권 한 번 바뀌었다고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반응하는 것도 역시 이런 근시안적이고 미시적인 사고방식이야.

나는 인생을 '순간'으로 평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한국사회와 한국 언론의 문제가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순간'적 시야에 휩쓸린다는 거야.

다만, 내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30~40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실로 이만큼이나마 자유와 민주를 얻었다는 거겠지.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꽃으로 피지도 못하고 스러졌다는 게 슬픈 일이고."

이때 사모님이 '강원도 강냉이'를 내오셨다. 마을에 온 상인이 하나도 팔지 못했다고 '개시' 해 달라고 해서 사오셨다고 한다. 사모님은 옆에 앉으시라는 권유를 쑥스러운 듯 사양하고 들어가셨다.

- 선생님의 저작 <역설의 변증> 가운데 "아내 윤영자와 나"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군사정권 때 옥고에 시달리시다가 출소하기로 결정된 날, 사모님께서 목욕물을 데워놓고 기다리셨지만 출소결정이 번복되어 만나지 못하시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 고생했지요. 국가나 사회적 곤란을 국민 모두가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내는 이 이외의 다른 고통도 당해야 했어. 학자와 언론인으로서 진실을 가면으로 덮고 집권하려던 세력에 맞서 싸우던 남편과 더불어 한 고통이었어요.

끊임없는 권력의 핍박으로 언론에서 두 번 쫓겨나고, 대학에서 두 번 쫓겨나 연금도 없이 생활하기도 했어. 집사람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지요. 이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니었지요. 그런 일을 안 했더라면 그런 고난도 없었을 테니까.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제 좀 편안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말도 여러 번 했어요."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민주화의 산물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한국의 젊은이들이 점차 보수화되어간다고 합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학생들을 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 대학가의 서점도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 제기되어 온 '인문학의 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지난날 치열하게 진보와 개혁을 위해서 싸웠던 우리들의 처지에서 보면,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인간의 욕구와 창의력을 마음껏 발현하고, 심지어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우리가 과거 언제 해 봤나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과 관습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의 보수화가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가운데에서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한국사회의 도덕적 파탄에 대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선생님 답변에서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품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한길사에서 12권으로 나온 선생님의 전집을 읽을 독자들 가운데 다수가 민주화 시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일 텐데요, 이 '젊은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지요.
"가장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물질의 최대소비를 최대행복으로 포장하는 미국식 소비주의의 허상을 깨달았으면 하는 거에요. 소유를 존재의 가치로 착각하는 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개인의 삶과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요.

인간경시와 생명경시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사회의 약탈적 문화가 바로 이 무비판적 소비문화에서 출발하거든요. '검소한 생활, 고귀한 사고(Simple life, high thinking)',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인터넷은 현대사회의 '마신', 책임감과 도덕성 가져야"

- 인터넷을 안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오마이뉴스>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면, 이 대안 매체를 위해서 일하는 후배 언론인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넷 안 해. 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 안 하는데. (일동 웃음) 인터넷은 안 하지만 <오마이뉴스>에 대해서 전해 듣고는 있어.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활자 미디어가 갖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이제 인터넷이 대체해가고 있다는 것. 인터넷은 다른 미디어의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인터넷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사명, 그리고 문제의식은 구텐베르크가 활자 매체의 신기원을 연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규칙과 능력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괴테가 말한 '마신(demon)'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래의 생존양식을 결정한다는 도덕의식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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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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