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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다. 예전처럼 삶은 계란에 도시락을 준비하지는 않아도 긴장감만은 그때 못지않았다.
부랴부랴 아침을 챙겨 먹고 유치원이 속해있는 대학교 대강당으로 갔다. 운동회 장소는 아침 일찍 나와서 준비하신 선생님들 덕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등 운동회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일곱 개 반 이백여 명이 넘는 유치원생들과 가족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대강당은 금방 가득 찼다. 좀 더 일찍 올 걸 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등으로 달리던 아이는 반대로 뛰고
원장 선생님의 인사말에 이어 아이들이 준비한 짱구 춤이 끝난 뒤 관람석에 앉아있는 엄마들을 불러내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강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과 함께 준비운동을 하는데, 비교적 간단한 동작이라 금세 따라할 수가 있었다.
열띤 응원전에서 아이팀이 선제점을 획득했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첫 게임으로는 반별로 달리기가 열렸다. 일곱 살 제일 큰아이들의 반은 맨 마지막으로 달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골인 점에서 엄마 품으로 달려가는 다른 아이들에 반해 내 아이는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엄마를 보고서도 다시 유턴을 해서는 출발점으로 냅다 뛰어 가버렸다.
이런 황당할 때가! 허공만을 얼싸안은 두 팔보다, 일등으로 달려들어 오던 아이가 왜 갑자기 뒤로 달려 가버렸는지가 더 궁금했다.
공 굴리기, 주사위 굴리기, 밧줄 뛰어넘기, 동굴 통과하기, 할머니 할아버지 낚시게임 등 모든 게임에 가족이 참여할 수 있게 구성돼 있었다. 그 덕에 강당에 모인 모든 가족들은 세월과 성별을 뛰어넘어 동심으로 돌아가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모든 경기에 출전해 아이와의 돈독함은 물론이고 상품까지 쓸어 가는 다른 아이들의 아빠를 볼 때면, 아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빠 없는 빈자리를 어느 때보다 절감했다.
남편도 '패'하고 나도 '패'하고
그때 누군가 내 눈을 가로막으며 7080세대도 하지 않는다는 "까꿍!"을 하는 게 아닌가. 돌아보니 남편이었다. "장사는?" 하려다가 오늘만은 아들을 생각해서 일부러 와준 그 부정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왔으면 했는데, 끝나고 자장면 쏴요!"
운동회날 먹는 자장면 맛이야말로 어느 진미보다 맛난 추억의 음식이 아니겠는가? 남편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려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탕수육도!"
그때 엄마들 줄다리기가 열렸고, 남편의 응원을 등에 업은 나 역시 출전을 했지만 아깝게 지고 말았다. 아이는 자기 팀이 진 것이 못내 아쉬운지 푹푹 한숨만 토해냈다.
다음은 아빠들의 줄다리기,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에 떠밀려 나가긴 했지만 남편 역시 오랜만에 해보는 줄다리기가 영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아빠 팀 역시 또 지고 말았다.
이런 낭패가! 그 많은 게임 다 몸 사리고 있다가 처음으로 출전한 게임에서 보기 좋게 져버렸으니 아이는 속상한 마음 금할 길이 없는지 금세 눈물바람이 되었다. 물론, 다음 게임에 또 나가면 된다. 하지만, 다음 게임 종목을 말하는 순간 난 얼른 쥐구멍을 찾아야만 했다.
달리기에 대한 안 좋은 추억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초등학교시절부터 달리기라면 맡아놓은 꼴찌였던 나에게는 운동회날이 1년 중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었다. 생전 자식들 공부에는 관심도 없던 아버지도 운동회 날만은 그물 일을 접으신 채 구경을 오시곤 했다.
남의 자식은 달리기에서 공책도 받고, 연필도 타는데, 우리 3형제는 누굴 닮았는지(태풍이 불어와도 팔자걸음으로 걸어오시는 아버지만 닮았지만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심)달리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어찌된 것이 넘의 자식들 꽁무니만 쫓아 댕기는지... 밥값도 못허는 것들!"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가 공부는 쟈들보다 낫은디요!"라는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동네 사람 다 보는데서 달리기 잘하는 것이 부모님 이름을 알리는 길이지, 시험 보고 매 한대 덜 맞는 것이 부모님 이름을 알리는 길이냐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곤 하셨다. 그 아버지 때문에 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운동회 날이면 학교 뒤 야산으로 도망가서 점심때만 고개를 내미는 홍길동 같은 학생이 되었다.
그런 나였는데, 달리기라니. 그것도 바통을 이어받는 계주! 죽인대도 못 한다, 아니 안 한다고 두세 번 다짐을 하는 순간, 선수 어머니를 뽑고 다니시는 아이의 선생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의 부르심에 벌떡 일어나 라인에 서다
'저 시선에서 얼른 벗어나야 하는데···.' 한번 나의 시선을 잡아챈 선생님은 놔주질 않으셨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일어섰다. 그리고 나갔다. 두 팀에서 한 반에 한 명씩의 엄마들이 나와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바퀴씩 도는 계주였고, 내 번호는 마지막 7번이었다. 내 비록 달리기는 못해도 들은 풍월은 지구를 두 바퀴 반은 돌고 남을 것이다. 마지막 주자의 막중한 임무를 알기에 얼른 앞자리 엄마와 자리교체를 했다.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약간 밀리기 시작한 달리기는 두 번째 주자가 넘어지면서 차이가 벌어졌고, 내 차례까지 왔을 때는 칼 루이스가 온대도 만회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m 달리기 기록이 30초인 내가 뛴다 해도 표정관리만 잘하면 진 것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차례. 바통을 이어받는 순간 다리가 휘청하니 꺾여왔다. 바통의 무게가 30kg 역기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면 그 누가 믿겠느냐마는 최소한 내 손에 전해오는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뛰었다. 각오는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손기정 선수였고, 표정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 못지 않았다.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그 순간까지 난 누가 뭐래도 그곳에 모인 가족과 아이들 가운데 최고의 비호였다.
그런데 마지막 주자가 또 넘어지고 말았다. 아까웠다. 다 이긴 게임이었는데. 이왕 진 게임인지라 내 마음대로 아쉬움을 달래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팀이 승리의 환호를 지를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박수를 보냈다.
비록 졌지만, 마음만은 황영조였다
달리기가 끝난 뒤 나는 채 진정되지 않은 가슴과 아직도 운동복 바지 속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다리로 단상으로 걸어가 태어나 처음으로 달리기로 인한 상을 받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준 것과,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의 상이었다. 진 팀은 이긴 팀보다 상품이 작았지만 내게는 파란색 인주로 팔뚝에 쾅하고 찍어주던 일등 마크보다, 일등에게 주어지던 공책보다 더 값진 상이었다.
오죽이나 좋았으면 모두 진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상품으로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는데, 나 혼자 나잇값도 못한 채 야호를 외쳤을까. 궁금하다며 아이는 빨리 뜯어보자고 했지만 난 나 혼자만의 감동을 더 맛보고 싶어 아이에게서 상품을 낚아채서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마지막은 간단한 포크댄스로 가족 간의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가족끼리 만나다 보니 나중에는 네다섯 가족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어색함도 잊은 채 포크댄스를 추면서 인사를 하고 웃고 있었다.
약 세 시간에 걸친 운동회는 부상자 한 명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 있었던 건, 유치원장님이 "모두 행복하셨죠?"하는 물음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네~!"라고 어린아이들처럼 목소리를 높여 대답을 한 것이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 행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원장님의 인사말에 내 아이도 잘 가르쳐주시고 계시겠구나, 앞으로도 잘 가르쳐주시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집으로 오자마자 조심조심 상품을 뜯었다. 포장지에 붙은 테이프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상품은 주방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코에 달면 코걸이, 귀에 달면 귀걸이라고 했던가. 비싼 상품은 아니지만, 원장님 말씀처럼 행복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깨끗이 닦고, 씻고,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