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일류>에는 '강건마'도 없고, '구석기'도 없으며, '개나리'도 없다. <혐일류>의 말하는 이는 '김한수'라는 대학생(<대털의 '교강용'을 닮았지만...)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에는 김성모 본인이 직접 등장해 <혐일류>를 그린 동기를 이야기하면서, '한일 양국의 우호적인 파트너십을 견지해야 한다"는 목적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야기한 "같이 손을 맞잡고 나가는 길만이 세계 속에서 생존확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생각은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임을 밝힌다.
김성모 스스로 밝힌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혐일류>는 감정적인 반론이라기보다, 자료 제시 중심의 '개념정리 만화'에 가깝다. 물론 거기에는 <혐한류>에 대한 반론 제기에 집중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둔 현재의 우리나라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승계했다고 이야기하는 등, 영화 <한반도>가 저지른 오류가 반복됐다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인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일본 극우, 왜 준동하나?
일본인은 전반적으로 장점은 받아들이고, 단점은 '소리없이 버리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혐한류>는 일본인의 그런 정서에서 어긋난 일부 기류를 가장 엉망으로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그럴듯한 근거 제시에도 평가할 가치가 없는 작품이다.
일본인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시민사회를 살면서, '혁명'을 잘 모르는 단점이 있다. '혁명'이란 결국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메이지 유신과 같이 '위로부터의 개혁'은 있을지 몰라도, 역동적인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전면적인 개혁은 없었다. 그동안 일본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양심 세력'들도 권력의 핵심이 개혁을 시도하면, 그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패턴이었다.
일본인들은 평균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극우의 준동을 일본 전체의 현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극우의 준동은 사실상 '정치 무관심'에서부터 비롯됐다는 아이러니가 함축돼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개혁이란 아래에서부터의 지지를 업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국민들이라면 그 '뜻'을 모으기란 자연스럽게 어려운 일이 된다. 일본 극우는 그런 환경을 업고, 지속적으로 일본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안도 유마의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일본인의 그런 한계를 일본인이 본격적으로 지적한 만화이기 때문이다.
김성모는 <혐일류>를 통해 권력을 잡은 일본의 극우 세력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핑계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복귀하고 있으며, 자위대를 증강하고 평화 헌법을 수정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정부의 뜻과도 거의 같은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과 중국이 격렬하게 전개하는 근거있는 비판에도, 극우의 움직임이 강해지는 것은 결국 일본 국민의 아쉬운 단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김성모 역시 "일본은 미국을 미워했지만, 미국은 일본에 '관대'했다. 미국은 일본의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황실 제도를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전쟁책임을 엄격하게 인식할 기회를 잃어버렸으며, 그런 좋은 기억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들이 침략한 국가의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모른다"라고 멋지게 정리한다. 근성의 김 화백, 이렇게 멋진 면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일본 극우의 준동과 비교해본 한국 정치
어려운 경제 현실과 잇따른 실언, 갈피를 못 잡는 개혁 방향 등,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일찌감치 떨어진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그의 등장과 대통령 당선의 의미는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경제 현실 탓에 정치에 대한 냉소는 깊어지고, 그 냉소는 투표율의 하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투표율의 하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구태 정치인들이 반가워할 수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그 근거는 일본의 정치 현실이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든 간에, 그 분야의 변화는 '관심있는 이들'의 관심과 참여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높은 투표율'은 구태에 젖은 기성 정치인에게는 '위협'이다. 인터넷에서 표출된 역동적인 참여의 기류는 사실상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이회창'이라는 상징을 무너뜨렸으며, 인터넷의 힘을 주목하고 이용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어려운 경제 현실 탓에 "(인터넷과 친숙한)젊은 것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라고 비판하는 일부 나이든 보수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다.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라 하더라도 그가 경제를 부활시켰을 것이라는 가정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IMF 사태'라는 최악의 사태를 유발한 장본인들이다.
뿐만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의한 태국 총리의 실각을 빗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타산지석"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뭘 발전시킬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조차 부정하는 이 무리들이 과연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과 상식을 반가워하고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낮은 투표율'은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부작용은 극우가 준동하는 일본의 정치 현실이 보여주고 있으며, 김성모의 <혐일류>는 그것을 집약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김 화백, 지금까지 보여준 '근성'을 이렇게 멋지게 활용했다면, '화백' 아닌 '화백 할아버지'라 불러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혐일류>가 우리에게 남긴 것
<혐일류>는 김성모 본인에게나, 우리에게나 많은 것을 남긴다. <혐일류>는 <혐한류>가 한국인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과는 달리 선량한 일본인은 긍정하며, 그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첨예한 논쟁 과정에서 상대방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는 두 가지 방향은 논쟁에 임하는 당사자의 '격'을 좌우한다.
사실 <혐일류>를 우려했던 이유는 김성모의 작품 패턴과 함께 그의 전작 <인간 침몰>이라는 만화를 봤던 기억 때문이다. <인간 침몰>은 통속적인 재미에 치중한 나머지, 일본인과 황실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면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필자가 본 '최악의 김성모 만화'로 기억한다. <혐일류>에도 <인간 침몰> 식의 관점이 개입됐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느꼈다.
김성모는 그런 함정과 우려를 극복하면서, <혐일류>를 비교적 양질의 만화로 탄생시켰다. 김성모가 앞으로도 그런 자세와 근성을 유지한다면, 보다 좋은 만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김 화백'이라는 호칭이 비꼬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를 갖출 수도 있다. 필자가 '김 화백'이라면 그 호칭이 '진정한 의미'를 갖도록 더욱 노력할 것 같다. 김성모가 그런 길을 선택하기를 기원한다.
| | <혐한류>는 어떤 만화일까? | | | 필자가 본 <혐한류> | | | |
| | | ▲ 야마노 샤린 作, <혐한류>의 표지 | | 말 많고 탈 많은 <혐한류>를 보면서, 처음부터 눈살이 찌푸려졌다. <혐한류>가 내건 '혐한'의 첫번째 이유는 여지없이 '2002 월드컵'이었다.
기사를 통해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지만, 필자는 '2002 월드컵'과 '한국 축구'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 볼 수 있었던 '월드컵의 광기'와 일부 맹목적인 '국위선양주의자(?)'들의 맹목적인 애국(?)이 타국에 의해 한국을 비하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혐한'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그런 현상을 그냥 놔둘 리는 없었을 것이다.
<혐한류>에는 월드컵 4강전 독일전 당시에 독일 축구대표팀 선수들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응원하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 사진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런 짓을 '애국'이랍시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국'은커녕, 한국을 악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료가 되고 말았다. 이 사진들은 영국 방송 BBC가 분석했고, FIFA도 일부분 인정했다는 한국 경기 관련 오심 목록과 함께, '혐한'의 근거로 활용된다. 멀쩡히 살아있는 올리버 칸과 미하일 클로제의 사진을 영정으로 탈바꿈한 그들, 과연 자신들의 말대로 '애국'을 한 것일까? 모를 일이다. 오히려 별 생각 없이 즐기고 응원하던 '보통 사람들'까지 졸지에 훌리건으로 만든 꼴이 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교훈은 "놀고 즐기더라도, 기본적인 개념은 갖추고 놀고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의 행동이 결국 '혐한'의 근거를 제공한 꼴이 됐다.
그 외에도 TV 쇼 프로그램 등의 일본방송 베끼기 등 우리 스스로 혹독하게 자정해야 할 움직임들도 지적돼 있다.
하지만 <혐한류>의 그럴듯한 유혹은 '거기까지'였다. '개념 갖춘 모범적인 일본인(?)'에게 억지를 부리다가 순응하는 '한국인의 전형'으로 그려진 재일교포 '마츠모도'에 관한 묘사는 <혐한류>의 목적이 '악의적'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조공'과 '속국'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작가의 역사적 무지 역시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독도 문제에 관한 그들 나름의 진지한 어조 역시 하품날 정도로 철 지난 유행가에 불과해 유혹이라 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비록 '철 지난 유행가'라 할지라도 포털 사이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본놈은 쪽바리, 죽일 놈"이라는 식의 단발적인 반론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우리도 알아야겠지만 말이다.
공식적인 영어표기까지도 우리 말을 따라 'Hwabyung'으로 규정됐다는 '화병(火病)'은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에서는 이 화병을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공인, 문화결함증후군의 하나로 등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 이야기는 <혐한류>에도 나온다. '죽일놈', '쪽바리'를 남발하는 방식의 반론과 문제제기는 결국 다시 한번 '혐한'의 근거로 활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 박형준 | | | | |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