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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과장의 '에세이'를 1면 기사로 뽑은 <동아> 25일자 조간신문.
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과장의 '에세이'를 1면 기사로 뽑은 <동아> 25일자 조간신문.

참사가 빚어졌다. 오보 참사다.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지난 7월 평양에서 열린 북한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연설한 내용으로,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대여섯 개 갖고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동아일보>와 <세계일보>가 이를 1면 톱으로 대서특필했고, <경향신문>과 <한국일보>도 1면에 올렸다. 비록 1면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주요 뉴스로 취급하기는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강석주 부상의 연설은 팩트가 아니라 소설이었고, 에세이였다. 문제의 연설문을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오보 참사를 야기한 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과장은 '에세이'라고 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북한의 상황을 가상해 풍자형식으로 쓴 에세이"로 "실제 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문제의 '에세이'를 보도하지 않았던 MBC는 강석주 부상의 연설이 '에세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늘 새벽 5시 19분에 송고했고 아침뉴스부터 집중 보도하기 시작했다.

어제(24일)밤 11시 17분에 문제의 '에세이'를 처음으로 송고했던 <연합뉴스>는 MBC가 송고하기 직전인 오늘 새벽 5시 7분에야 기사 전문을 취소했다.

대대적 오보 사태 천재인가 인재인가

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과장의 '에세이'를 대서특필한 <조선> 25일자 조간.
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과장의 '에세이'를 대서특필한 <조선> 25일자 조간.

참사가 발생했으니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천재인가 인재인가? 분명히 인재다.

참사를 야기한 로버트 칼린은 "한국 언론이 왜 뒤늦게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다. "뒤늦게"라는 표현이다. 인재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로버트 칼린은 문제의 연설문이 지난 14일 워싱턴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이미 발표된 내용이라고 했다. 브루킹스연구소 주최의 토론회를 지칭한 것이다. 로버트 칼린은 "그날 브루킹스연구소 세미나 참석자들은 강석주 부상의 연설이 실제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다 이해했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열린 브루킹스연구소의 토론회 내용은 일부 국내 언론에 의해 보도까지 된 것이었다.

'에세이'를, 그것도 이미 열흘 전에 발표된 '구문'을 확인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보도했으니, 누가 봐도 인재임에 분명하다.

인재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도 어김없다. 미국 맹종주의다.

'평화통일시민연대'가 지난 22일 연 토론회에서 제기된 문제가 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가 남측의 안보를 위협하는가에 대한 어떤 검토도 없이 안보위협론이 대두되고 있는데 그 주된 역할을 언론이 맡고 있다고 했다.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돈 주고 사는 것일 뿐"이란 극단적 평가도 나왔고, "미국 현지중계만을 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도 나왔다.

핵심은 '미국 현지중계'다. 출처가 언론이든, 관료이든, 전문가이든 미국발이면 일단 받아쓰고 보는 '묻지마' 보도가 적잖았다. 그 탓에 어제의 보도와 오늘의 보도가 다르고, 이 사람의 코멘트와 저 사람의 코멘트가 다르기 일쑤였다.

차제에 하나 짚고 가자. 미 행정부의 언론플레이, 예를 들어 국무부나 국방부, 백악관의 관료가 익명의 그늘에 숨어 한 마디 하는 걸 받아쓰는 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넉넉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안은 민감한데 공식부문에서 나오는 코멘트는 극히 의례적이기 때문에 뉴스가 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미국 내 북한 전문가 거리낌 없이 대서특필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른바 미국 내 '북한 전문가'들의 코멘트를 아무 거리낌 없이 대서특필하는 경우다. '북한 전문가'의 프로필에 전직 국무부 또는 국방부 고위 관료란 타이틀이 끼어 있고, 아니면 미 행정부에 영향력이 있다는 인물 설명이 곁들여진다.

그래서 공신력이 있어 보이지만 아니다. 그래봤자 그들은 야인이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미 행정부의 정책 결정 특성상 '북한 전문가'의 '말발'은 그리 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단지 야인의 '의견'에 불과한 것을 한국 언론은 '사실'로 큼지막하게 보도한다. 이게 문제다.

미국은 포청천이 아니라 분쟁 당사자다. 따라서 미국발 팩트와 의견은 맹종거리가 아니라 검증대상이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묻지마' 현지중계를 한다. 익명 관리의 코멘트는 둘째 치고 야인의 사적인 의견조차 주요 뉴스로 취급한다. 이런 보도행태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물을 필요조차 없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대형 참사는 초강력 경보 기능을 수행한다. 미국 맹종이 미국 맹신을 낳는, 왜곡된 뉴스 유통구조에 빨간불을 켜게 만들었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로 손색이 없다.

다만 한 가지만 환기하고 넘어가자. 대형 참사의 경보 기능이 단지 '그 순간'에 한정됐던 기억상실증 세태만 경계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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