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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어디로 갈까?> 겉표지
<여보, 어디로 갈까?> 겉표지 ⓒ 아침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가족과 혹은 부부가 함께 여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부부가 자동차 여행을 떠나 호젓한 숲길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해지는 사막을 지나 해뜨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해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남부러워 할 만한 미국 서해안 3개주(오리건, 워싱턴, 캘리포니아)를 돌아보는 자동차 여행을 9년 동안이나 계속해 온 부부가 있다. 자동차 운전대는 당연히 남편이 잡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아내가 맡았다.

운전을 하고 여행기를 쓴 주인공은 현직 교사로 정년을 5년 남겨둔 정명자씨. 조수석에 앉아 지도책을 펼쳐놓고 길잡이를 했던 남편은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장에 재직 중인 현 한국언론법학회 회장 유일상 교수.

운전을 맡았던 정명자씨는 9년 동안의 여행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고 틈틈이 원고 정리를 했고, 남편 유일상 교수가 아내의 글을 다시 읽고 글다듬이 역할을 했다. 서로 보듬고 인생의 멋을 즐기는 부부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다. 30년 넘는 결혼 생활 동안 룸메이트 덕분에 '여행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는 정명자씨의 고백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여보, 어디로 갈까?>에는 1997년부터 2006년 까지 미국 서해안 3개주를 꼼꼼하게 답사하며 그 지역의 문화, 명승지, 음식, 자연환경, 서민들의 생활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직을 정년퇴직한 후 여행전문가나 관광 안내원이 되고 싶다는 정명자씨는 이 책으로 벌써 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벌써 이 책에서 언급한 지역 외에 다른 곳까지 더해 다음 책까지 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자, 그럼 <여보, 어디로 갈까?>를 펼쳐 놓고 미국 3개주를 돌아보도록 하자.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다시 영어사전을 펴다

"자동차 면허 등록사무소(D.M.V)에 가서 면허에 관한 책자를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몇 십 년 동안 영어와 담을 쌓아 왔던 터라 책자에 적힌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는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세 번쯤 훑어보고서야 필기시험을 치렀다. 한 번 떨어지면 1주 후에, 두 번 떨어지면 한 달 후, 세 번 떨어지면 6개월이 지나야 다시 시험 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자동차 여행을 위해 먼 이국땅에서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면허시험을 준비했던 그녀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1차에 합격을 한다. 필기 시험을 단 한 번에 합격하고 '외국인일수록 많이 떨어진다'는 실기 시험도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한다. 대단한 집중력으로 면허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

만약 그때 그녀가 면허시험에 떨어졌거나 포기 했다면 이 책이 빛을 볼 수 있었을까. 여기서부터 <여보, 어디로 갈까?>의 부제이기도 한 '자동차로 달린 정명자의 미국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의 출발에는 항상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인데, 아마도 이국 땅에서 취득한 면허가 오랜 자동차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신감을 그녀에게 불어넣었을 것이다.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인디언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미국의 서부라고 하면 거친 황야, 카우보이, 역마차, 인디언…이 떠오른다. 모두 어린 시절 넋을 잃고 보았던 '서부'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이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인디언 보호구역과 서부영화를 촬영하는 영화 세트장에만 한정되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알래스카의 223개 인디언 부족을 비롯하여 미국에는 모두 550개의 인디언 부족이 275개의 보호구역에서 연방정부의 인정을 받고 특별한 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인디언 부족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미국 연방과 법적으로 동등한 정부 대 정부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디언 보호구역은 '법'이라는 무기를 들고 사실상 아메리카의 광활한 토지를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간 역사의 유물이다."

<여보, 어디로 갈까?>에는 이제 백인들에 밀려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며 전통 조차 유지하기 힘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속사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코길, 쿠스, 클라마스 부족 등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카지노를 운영하며 그 수익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자신들의 옥토를 모두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척박한 보호구역(보호 구역내에서는 사유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에 묶여 살고 있는 그들은 농사를 짓거나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정부의 허가를 얻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카지노를 열고 도박판을 벌여 먹고 사는 것 외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와중에 보호구역 내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던 윌로우스 벌판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브레이크를 밟은 곳은 윌로우스 벌판. 윌로우스 벌판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노백린 장군의 염원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13년 노백린 장군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하와이에 농장노동자로 미국 땅에 처음 이민왔던 한국사람 100여명을 이곳으로 이주시켜서 논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농장 한쪽 편에 비행장과 항공기 조종 훈련장을 만들어 비행기술을 습득시켰다."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공군력이 필수라고 생각했던 노백린 장군은 농장을 경영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비행기를 구입하고 비행사를 양성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이곳에서 훈련받던 이들은 참전조차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독립의 꿈이 서려있던 윌로우스 평야는 이제 한국 농민의 삶을 욱죄는 미국산 수입쌀의 주요 생산지로 변모했다. 그 평야에 서서 내뱉은 그녀의 한탄을 옮겨 본다.

"그들의 희망과 한이 서린 이 지역이 비행기를 이용하여 씨를 뿌리고 거두는 대규모의 벼농사 농장지대로 변했다. 이제는 5천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농업 노동자들이 쌀농사를 짓는 우리나라의 100만 농민들의 더 나은 삶을 억압하는 현실의 조건을 만들고 있다. 인간만사는 이렇게 아이러니컬하다."

컬러 사진과 상세한 경로를 볼 수 있었으면

<여보, 어디로 갈까?>의 마지막 행선지는 캘리포니아주와 인접한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 기나긴 여정을 마치며 그녀는 '진짜 멕시코가 보고 싶다'고 적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역시 사진과 레이아웃. 화려한 컬러 사진과 과감한 디자인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요즘 여행서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책값은 다른 여행서에 비해 저렴하지만, 다음 책에선 값을 올리더라도 여행지의 생생한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컬러사진을 넣고, 이곳을 여행하고픈 독자를 위해 꼼꼼한 경로를 표시한 도로지도까지 포함시키면 어떨지. 아마 다음 책에선 멕시코의 원색이 그대로 묻어난 사진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독자의 입장에선 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정갈한 문장으로 여행지의 모든 것을 전달해 주는 글쓴이의 꼼꼼함이 이 책의 다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제목 : <여보, 어디로 갈까?> (자동차로 달린 정명자의 미국여행)  
지은이 : 정명자
출판사 : 아침
출간일 : 2006.07.30
가격 : 9천원


여보, 어디로 갈까? - 자동차로 달린 정명자의 미국여행

정명자 외 지음, 아침(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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