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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관. 옛 관문은 없어지고, 새로 지은 관문이 사막에 뎅그마니 서 있다.
옥문관. 옛 관문은 없어지고, 새로 지은 관문이 사막에 뎅그마니 서 있다. ⓒ 최성수
돈황에는 큰 관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양관(陽關)이고 다른 하나는 옥문관(玉門關)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이고 옥문관은 북쪽이다. 난주, 주천, 가욕관을 거쳐 이어온 실크로드는 돈황을 지나면 옥문관 쪽과 양관 쪽으로 갈라진다. 타클라마칸 사막 길을 지나는 실크로드를 천산남로라고 한다. 천산남로는 세 갈래의 길로 나뉜다. 서역북로, 서역중로, 서역남로가 그것이다.

옥문관을 나서면 길은 누란, 쿠처를 거쳐 카슈카르로 이어진다. 이 길이 천산 남로의 서역 중로에 해당된다. 돈황에서 바로 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하미, 선선, 트루판, 우루무치로 이어져 천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가는 서역 북로다. 양관을 지나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따라 차말, 호전을 거쳐 카슈카르로 이어진다. 이 길은 서역 남로다. 그동안 내가 여행한 길은 옛 실크로드의 길로 치면 서역 중로에 북로의 일부가 섞인 길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출발점인 돈황에 지금 서 있다. 숱한 옛 사람들이 돈황 이 길에 서서 가야할 막막한 사막에 대한 노래를 읊었다. 그 노래들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양관이고 옥문관인 것은 그런 때문이다.

지난 여행 때 양관을 갔다 왔으므로, 이번 여행길은 옥문관을 택한다. 말 그대로 옥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라는 뜻의 옥문관은 돈황에서 세 시간 가까이 사막 길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황무지 사막과 낙타풀을 다시 지난다. 햇살은 어김없이 쨍쨍하다. 바라보면 눈이 시린 하늘이 사막의 끝에 닿아 있다. 한참 그런 풍경 속을 달리는데, 지평선 저 끝에 넘실넘실 물살이 출렁이는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다. 분명 호수다. 물살이 출렁이는 모습도 선하다. 그런데 그것이 신기루란다. 쨍쨍한 햇살과 끝없는 지평선, 아지랑이들이 뒤엉키면서 만들어낸 신기루를 보고 달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사막에 쓰러져 모래의 일부분이 되었을까?

돈황 시내 과일가게 아저씨들. 사막의 과일을 한 아름 사 들고, 우리는 옥문관으로 갔다.
돈황 시내 과일가게 아저씨들. 사막의 과일을 한 아름 사 들고, 우리는 옥문관으로 갔다. ⓒ 최성수
그런 막막한 기분으로 옥문관 가는 길을 달린다. 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길이 이제 본격적인 사막의 아득함 속으로 뻗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혜초의 길이고 삼장법사의 길이며 동시에 실크로드의 개척자인 장건의 길이기도 하다.

장건, 은하수 끝을 보고 온 사람

장건은 한나라 무제 때의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은하수의 끝을 보러 갔다 왔다고 한다. 위나라 때 장화가 쓴 <박물지>에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은하수 끝을 보러 갔다 온 사나이가 있는데, 이 전설이 후세에 재창작되면서, 황제는 한무제로, 사나이는 장건으로 바뀐다. 전설의 사나이가 장건이라는 실제 인물로 바뀌는 것은, 장건의 삶이 그만큼 독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건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기 위해 장안을 떠난 것은 기원전 139년의 일이다. 당시의 황제는 한무제였다. 한무제는 늘 북방 흉노의 강성한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몽골 고원의 지배자는 원래 월지(月氏)라는 나라였다. 기원전 3세기까지도 몽골 고원은 월지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210년 무렵을 전후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흉노가 월지를 몰아내고 몽골 고원을 차지했다. 한 무제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흉노의 지배권 밖으로 쫒겨난 월지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할 계책을 세운다.

문제는 월지를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하고, 그 사막 곳곳에 있는 흉노의 세력권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데 있었다.

옥문관 봉화대. 밑둥만 남아 세월을 지키고 있다.
옥문관 봉화대. 밑둥만 남아 세월을 지키고 있다. ⓒ 최성수
한무제는 그 일을 맡아 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이에 응모하여 뽑힌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그러니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첫 번째 외교사절인 셈이다. 한무제는 떠나는 장건을 위해 백 명의 부하를 딸려 보냈다. 그 중에는 흉노 출신의 감보라는 충직한 부하도 끼어 있었다.

장안을 떠난 장건 일행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농서(隴西)에서 흉노에 체포되고 만다. 그 후 10년 동안, 장건은 흉노의 포로로 흉노 여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완전히 흉노 사람이 된 것처럼 살았다.

기원전 130년, 장건은 감보를 비롯한 일행들과, 흉노의 정세가 불안해진 틈을 타 탈출하여 다시 월지로 향한다. 10년이 다되도록 무제의 신표를 몸에 지니고 살아온 장건은 대원국(大宛國, 지금의 우즈벡 공화국 부근)을 거쳐 드디어 대월지(大月氏:우즈벡 공화국 부근)에 도착한다. 그러나 대월지는 이미 흉노에 대한 반감을 지우고, 반농반목축의 윤택한 생활에 젖어있어,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한다.

장건 일행은 더 서쪽으로 가 대하국(大夏國:아프가니스탄 북부)으로 갔다가 귀국하게 되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흉노에 잡혀 1년 더 억류되어 있다가 다시 탈출, 기원전 126년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13년에 걸친 서역 방랑길이었다. 이때 함께 돌아온 사람은 떠난 백 명 중 감보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비록 동맹 외교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이 업적은 한무제에게 서역 경략이라는 포부를 더 굳게 심어주었다. 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황제의 고문)로 임명하고, 서역에 대한 온갖 정보를 듣게 된다.

옥문관 밖에는 제법 물이 고여있다. 이 물이 어쩌면 사막길로 나서는 사람들의 마지막 샘이 아니었을까?
옥문관 밖에는 제법 물이 고여있다. 이 물이 어쩌면 사막길로 나서는 사람들의 마지막 샘이 아니었을까? ⓒ 김희년
기원전 123년에는 장군 위청의 흉노 공격에 교위로 참여하여 서역 외교 길에 얻은 경험을 전투에 활용하여 큰 공을 세우고, 박망후(博望侯)로 임명된다. 말 그대로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뒤 장건은 굴곡의 삶을 이어가다 기원전 114년 장안에서 사망한다. 장건의 서역 원정은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때까지 중국인의 의식 밖에 존재했던 서역을 비로소 인식 안으로 끌어들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장건의 이 원정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 오아시스 국가들을 찾아 외교 사절로 출발했고, 그 길을 따라 온갖 교역들이 이루어졌으니, 장건이야말로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옥문관 너머 사막길은 사라지고

차가 옥문관 앞에 멎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관문은 없다. 그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조잡스럽게 보이는 현대판 문이 하나 생뚱맞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사방은 사막이다. 멀찌감치 흙벽이 덩그마니 놓여있다. 얼른 달려가 보니, 옥문관이라는 빗돌이 놓여있다. 관문은 없어지고, 옛날 자취만 이렇게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봉화대였다는데, 봉화대인지, 관문의 아랫부분인지조차 분간이 안 간다.

옥문관은 한나라 무제 때 이광리의 페르가나 원정 때, 돈황이 군사 기지인 둔전으로 개발되면서 설치된 관문이다. 그 뒤 오랜 세월 옥문관은 양관과 함께 서역으로 나가는 중국의 국경 역할을 해 왔다. 허텐의 옥이 이 문을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옥문관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웅덩이에 풀도 꽤 돋아있는 옥문관 밖의 한 곳. 적은 물도 반갑다.
웅덩이에 풀도 꽤 돋아있는 옥문관 밖의 한 곳. 적은 물도 반갑다. ⓒ 김희년
흔적만 남은 옥문관, 몇 해 전 갔을 때 역시 흔적만 남아있던 양관, 두 관문을 거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막 길로 나섰을까? 그들은 어떤 꿈을 꾸며 그 아득한 모랫길을 건너 또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일까?

옥문관 주변은 제법 풀도 자라고 물도 흥건히 고여 있다. 이 관문을 나서면 다시는 저런 풀과 물이 흐르는 땅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에 목메었을 옛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원이를 안서로 보내며(送元二使安西)를 떠올린다. 시의 무대가 양관이고, 내가 거쳐 온 트루판, 쿠처 같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위성 아침 비
장안의 먼지 씻어내니
여관 앞 푸릇푸릇
버들빛 새로워라
그대여, 이 술 한잔
다시 받으시게나
서쪽 양관 밖에는
나 같은 친구도 없으리니.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장안에서 아득한 거리의 안서로 사신가는 친구에게 밤새 취하도록 술 마시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랜 시인은, 아침 싱그러운 장안 풍경에 마음이 더 슬퍼진다. 말고삐 풀며 떠나는 친구를 붙잡고, 다시 한 잔 술을 더 권하며, ‘양관 밖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나가면, 이제 다시 못볼 지도 모르네, 친구여.’ 하고 말을 건넨다.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 아득한 거리라 바로 아쉬움의 뿌리이고, 그 거리 이쪽에 양관이 있고 옥문관이 있다.

한나라 때 쌓은 장성. 성도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모래처럼 가라앉고 있다.
한나라 때 쌓은 장성. 성도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모래처럼 가라앉고 있다. ⓒ 최성수
문득 왕유의 마음이 되어, 옥문관에 엉기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옥문관 너머 아득하게 이어진 사막 저편으로 다른 한 편의 시가 떠돌고 있다.

야광배에 가득 담긴 향기로운 포도주
마시려니 비파 소리 말을 재촉하네
그대여, 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비웃지 말게
예전부터 원정 떠나 돌아온 이 몇이나 되나.
(葡萄美酒夜光杯/欲飮琵琶馬上催/醉臥沙場君莫笑/古來征戰幾人回)


역시 당나라 시인 왕한의 <양주사(涼州詞)>다. 그렇다, 이곳 옥문관을 거쳐 돈황에 온 옥으로 만든 야광배에, 사막의 과일 포도주를 마시며, 술 보다도 사막의 막막함에 취한단들 누가 무어라고 하겠는가?

나는 옥문관 너머 아득하게 이어진 사막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옥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나라의 장성도 역시 사막 속에 스러져가고 있다. 그저 길게 이어진 성의 아랫도리만 남아있을 뿐, 사막의 햇살과 바람 속에 성은 이미 사막이 되고 있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그 긴 세월을 조금씩 조금씩 스러지며 견뎌낸 저 장성의 아득한 시간을 생각해 본다.

그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명사산 아래의 호텔 옆 술집에서 나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장건이나 왕한처럼 잠이 들고 말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진 것은 원정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숱한 사람들의 넋이 이곳 사막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취한 잠 속으로 밤새도록 내 귓전을 소곤댄 것은 어쩌면 명사산 가는 모래 쓸리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한장성. 하늘과 아득한 사막 사이에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한장성. 하늘과 아득한 사막 사이에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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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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