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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둑을 만나러 가는 일을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남현수는 자신이 해외출장을 가는 목적을 주위에 얘기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대학 측도 당연한 일을 처리한다는 듯이 남현수의 해외출장을 받아들였고 주위의 누구도 출장을 가는 목적에 대해 별달리 물어보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남현수는 출발전날 필요한 물품을 사러 대형마트에 들렀다.
“손님, 마침 행사 중인 여행 가방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마트에서 흔히 지나쳐 듣는 판매 도우미의 상투적인 말투였지만 마침 남현수가 찾는 물건이었기에 지나칠 칠 수는 없었다. 남현수는 제품의 장점을 열거하는 도우미의 말을 들으며 여행가방의 손잡이에 달려있는 상품소개서를 슬쩍 들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상품소개서에는 한 여성모델이 방긋 웃는 표정으로 바퀴달린 여행가방을 밀고 있었다.
‘이건 수이다!’
남현수는 저도 모르게 판매원에게 소개서를 보이며 물었다.
“이 사람 아십니까?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판매원은 마치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양 남현수를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여자 일일연속극에 나오는 탤런트잖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남현수는 마치 머리를 강타당한 것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외계인이 날 기만한거야!’
대충대충 물건을 사서 연구실로 돌아온 남현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해당 일일연속극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분명 일일연속극에 나온다는 그 여자는 남현수가 7만 년 전의 광경에서 본 수이의 모습과 똑같았다. 수이뿐만 아니라 오시의 모습도 해당 일일연속극의 조연급 연기자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7만 년 전의 인물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환생했다고 믿을 정도로 남현수는 어리석지 않았다. 남현수는 마르둑이 말한 ‘사이코메트리 증폭기’라는 것은 사실 자신이 무심코 지나쳐 보았던 이미지들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내어 눈앞에 펼쳐 보인 것에 불과하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르둑의 조작은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남현수로서는 아직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말을 믿고 굳이 케냐까지 갈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남현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마르둑은 날 구태여 불러 7만 년 전의 일을 보여주며 자신을 케냐로 오라고 했을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가 아닐까?’
만약 자신들에게 불리한 무엇인가를 남현수가 알고 있어서 혼선을 줄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남현수는 고민 끝에 조작으로 의심되는 상황들을 일단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케냐까지 가기를 결정지었다.
결국 남현수는 마르둑을 만나 겪은 일들을 밤 세워 글로써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벽 무렵에야 정리가 마친 남현수는 이것을 출력하여 여러 부를 복사한 후 각 20여 곳의 언론사 주소를 출력하여 서류봉투에 붙인 후에 나누어 넣었다.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연구실을 나서서 짐을 꾸리고 남은 일을 마무리 지은 뒤 인천공항으로 향해야 하는 남현수가 이를 직접 부칠 여유는 없었다. 남현수는 조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녀석아, 제발 받아.’
전화벨이 10번쯤 울렸을 때 조교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교수님?”
“그래 나야. 새벽에 미안해. 내가 내일 출장 가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부탁이 있어. 연구실에 봉투가 있는데 그걸 빠른 등기로 보내주기 바래. 돈은 서랍 안에 둘 테니까. 그럼 부탁해.”
조교의 심드렁한 대답이 이어진 후 남현수는 긴 소파를 벽으로 밀어붙여 만든 임시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 짜증스러워는 하겠지만 조교가 그 일을 가볍게 처리할 것을 남현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몇몇 언론사는 무시하겠지만 최소한 서너 곳의 언론사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남현수는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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