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6일 취임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내달 초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양국 외교당국은 아베 총리의 구체적인 방한 일정 조정에 들어갔다.
한·일 정상회담 추진 소식은 일본측에서 먼저 나왔다. <교도통신>은 29일 아베 총리가 내달 7일을 전후해 한국을 방문, 노 대통령과 회담하는 방향으로 조정 중이라고 한일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후지TV도 이날 아베 총리가 5~8일 사이 서울을 방문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들은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면서도 정상회담 추진이 일정조정 단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추석 연휴에도 가능한지 여부를 포함, 구체적인 일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도 "추석 연휴 때 한다는 건 어려운 일 아닌가"라고 말해 정상회담 개최 자체는 기정사실화하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고위당국자는"10월 중순 이전을 염두에 두고 협의중이며, 추석명절에 지장을 주는 일정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현재 임시국회가 열리고 있는 점을 감안, 내달 7~8일 주말을 이용한 방한을 희망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 일본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그 간의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1박2일 일정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무현-아베 전화통화, 무슨 얘기 오갔나?
야스쿠니 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 양국간 현안들 때문에 난망한 것으로 보였던 한·일 정상회담 추진이 이렇게 급물살을 타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28일 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간 전화통화가 큰 전환점이 됐다.
아베 총리는 먼저 전화를 걸어와 노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고 환갑을 축하하면서, 한·일 우호협력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도 야스쿠니 문제 등 그 동안 양국간 갈등이 돼왔던 문제들을 일체 건드리지 않은 채 "일본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아 총리에 취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양국관계가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덕담만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측 브리핑에 따르면 두 정상은 양국간 갈등요인이었던 동해 방사능 조사 문제가 최근 '공동조사'라는 형태로 원만히 해결된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쁜 일(아베 총리)" "양국이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의지를 나타낸 것(노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 아베 총리가 "가능한 빨리 만나기를 기대한다"고 하자, 노 대통령도 "동감"이라고 화답했다는 것. 윤태영 대변인은 "양국 정상은 적절한 시기에 만나 한일관계 증진 방안에 관해 의견교환을 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취임 축전을 보낸 데 대해 사의를 표시하는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이례적인 일로, 강한 관계 개선의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신임 총리가 먼저 '성의표시'를 해온 만큼 자연스럽게 화답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것.
야스쿠니신사 참배 않겠다는 간접 메시지?
정부는 그 동안 신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등 한·일간 역사문제에 대해 전향적 행동을 보일 것을 정상회담의 사실상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왔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약속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아베 총리가 한일관계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체가 적어도 내년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 때까지는 적어도 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간접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신임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간 정상회담이 재개된 뒤 야스쿠니 참배로 다시 등을 돌리게 되면 내년 참의원 선거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아베 총리측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이미 총리가 되기 전인 지난 4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것으로 일본 언론들에 보도됐다.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는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는 이미 참배를 했기 때문에 내년 가을까지 다시 참배를 하지 않더라도 국내정치적으로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커다란 성과를 기대한다"... 덕담 혹은 압박
노 대통령은 28일 전화통화에서 아베 총리에게 "국민의 지지가 높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임기 중 커다란 성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얼핏 '덕담'으로 들리지만, 한·일간 현안들을 전향적으로 풀어나가라는 강한 '압박'이기도 하다.
어렵게 복원될 것으로 보이는 한·일 정상회담이 새로운 관계발전의 계기가 될지, 아니면 더 상황만 악화시키는 일회성 전시행사로 그치고 말지, 결국 양 정상의 정치적 역량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