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후 흙으로 덮어 놓아
경원선 전곡역에서 내렸다.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서 미산면으로 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았다. 하루 한 번 있는 동이리행, 하루 네 번 있는 백학면행 차편 모두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당포성이 있는 곳은 아는데, 당포성 찾아가는 사람을 태우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처음일까.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 말이 이해되었다.
지난 9월 14일, 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 취재로 찾아간 연천 당포성. 한마디로 허탈하였다. 성벽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그나마 형태를 갖춘 구간은 발굴조사가 끝난 후 보존을 위하여 흙으로 성벽을 덮어버렸다.
물론 당포성을 찾아가면서 성벽을 복원하고,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구려성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 구멍 흔적이나 ‘확(確)’을 직접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흙으로 덮어버린 성벽에 온몸의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성벽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봤지만 성벽 바깥쪽 둘레에 길 하나 제대로 닦아놓지 않은 성곽은 풀만이 무성하였다. 성벽 상단부가 조금 드러난 곳이 있어 덮어놓은 흙을 밟고 올라가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할 수 없이 연천군청에 전화를 걸어 발굴 당시의 성벽 사진 몇 장을 요청하였다. 전화를 끊고 흙으로 덮은 성벽 앞 공터에 주저앉아 성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곽은 사방 성벽이 꼿꼿하게 허리 펴고 있을 때가 보기 좋다. 허물어진 성벽을 볼 때마다 석성의 생명력이 다해 힘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성의 외형에만 지나치게 눈길을 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토석이 품었을, 어쩌면 여전히 품고 있을 군졸과 백성의 숨결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성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진 허물어진 성곽에서 성돌 하나, 흩어진 와편 한 조각도 성의 일부이다. 성벽이 들어선 곳은 암반이나 토석이거나 하다못해 물구덩이 하나, 나무 몇 그루라도 성곽 아닌 것이 없다.
하물며 시간이 흘러 군량과 무기와 군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억새나 소채들이 자라는 것 또한 백성을 지키고 먹이는 나라 경계 안의 일이 아닌가. 동북공정에 대처하는 것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모두 나라 살림의 일환이니 견고한 성축 기단마냥 마음 먼저 든든해야 옳지 싶다.
고구려성의 특징 갖춰
올해 1월 2일 사적 제468호로 지정된 당포성은 당포나루로 흘러들어오는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삼각형 절벽 위 대지에 동쪽 입구를 가로막아 쌓은 석성이다. 남북쪽이 깎아지른 단애의 삼각형 절벽은 마치 거대한 항모를 연상시킨다. 임진강이 흘러가는 서쪽을 향해 선수(船首)를 두고, 동쪽을 가로막은 성벽은 함교(艦橋) 지점에 해당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당포성은 현재 전곡읍의 서북쪽 임진강 북안과 그 지류에 형성된 천연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지성이다. 서쪽 부분이 뾰족한 모양인 삼각형 형태로 이러한 구조 때문에 가로막아 쌓은 동쪽 성벽은 매우 높게 구축되어 있으며 단애지대를 따라 구축된 남·북 성벽은 낮게 축조되었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가 주변에 위치한 은대리성이나 호로고루와 매우 흡사하며, 특히 축조방식은 호로고루와 매우 밀접하다. 서쪽 끝에서 동벽까지의 길이가 200m이며, 동벽의 길이는 50m, 전체둘레는 약 450m 정도이다. 현재 잔존 성벽은 동벽 높이 6m, 단면 기저부 39m 정도이며, 성내부로의 출입 때문에 동벽의 남단은 성벽이 일부 파괴되어 출입로가 만들어졌고, 북단의 경우에는 참호 건설로 인하여 파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밭을 일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발길 끊긴 그곳이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학계의 관심을 촉발시킨 것이 사실이다. 당포성은 여러 모로 비상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고구려성이 갖는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성벽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구멍 흔적이 발견되었다. 인 일명 ‘석통(石洞)’ 또는 ‘주통(柱洞)’이라고 불리는 이 구멍 흔적은 기능이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흔적이 남한에서 확인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육군사관학교 국방유적연구실이 당포성의 학술발굴조사를 하면서 동쪽 성벽을 절개해본 결과 지름 20cm의 구멍 흔적은 성벽 상단부에서 수직으로 약 1.5미터 이상이 나 있으며, 두 군데서 확인되었다. 특히 이 구멍의 제일 밑바닥에 돌절구처럼 홈을 판 ‘확(確)’이 확인되어 ‘주통’의 기능 추측의 단서를 제공한다.
전성영씨는 저서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에서 “당포성의 경우는 수직혈의 기저부에 확이 설치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수직홈에 목재를 끼우고 이 목재가 회전운동을 했던 것 같다. 수직혈과 확으로 구성된 이 유구는 투석기나 노(弩 : 기계장치에 의해서 발사되는 활)를 설치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보인다.
미수 허목의 <기언별집> 기록 바탕으로 발굴조사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성은 웬만하면 조선의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현재 연천군에 묘역을 두고 있는 미수 허목의 <기언별집(記言別集)>에 “마전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고루(古壘)가 있었는데, 그 위에 총사(叢祠 : 여러 신을 모신 사당)가 있고, 그 앞의 나루를 당포라고 한다. 큰 우물이 흘러 진로가 소통된다.”라는 당포성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이를 바탕으로 1995년부터 2003년 사이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구려 토기 일부가 발견되었고, 표토를 벗기자 완벽한 형태의 석축성벽이 드러났다.
당포성은 임진강, 한탄강변에 인접한 호로고루와 은대리성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렸으며, 성벽을 보강하는 보축벽도 높게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성곽주변의 공터 바닥을 살펴보았다. 당포성을 소개한 글에서 지금도 성곽 주변에 와편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시대가 뒤섞인 와편이며 토기, 자기 조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시간과 풍우에 닳고 깨졌지만, 그 와편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불변(不變)으로 만변(萬變)에 대응한다고 했던가. 나는 몇 개의 와편과 토기조각을 수습하는 것으로 ‘불변’을 대신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당포성 가는 길>
승용차로 동두천 지나 전곡까지 간 다음, 372번 지방도로를 타고 미산면이나 군남면 방면으로 간다. 375번 지방도로 분기점인 마전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00미터를 더 가면 오른쪽으로 당포성으로 가는 이정표와 함께 샛길이 나온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경원선 전곡역에서 내린다.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간 다음, 미산면 동이리나 백학면 방면 버스를 이용한다. 동이리행은 저녁 5시30분 1회, 백학면 방면은 오전 6시20분, 11시20분, 오후2시30분, 5시30분 이렇게 네 번 있다. 택시를 이용하면 15,000원 정도 나온다. 20분소요.
*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에도 송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