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명절은 아주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년에 두 차례 고향집을 향하는 길고 먼 귀성길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맞는 교통체증이 아니라 분명히 그럴 것을 알면서도 떠날 채비를 하는 묘한 현상. 귀성짐을 꾸리면서 흔히들 ‘아이고 이번에도 죽었다’는 투의 엄살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그건 일종의 설레임의 표현이자 오랜만에 찾는 고향에 대한 어리광일 따름이다.
최근 명절 때마다 귀성 대신에 해외여행을 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그로 인해서 서비스 수지 적자가 세계 2위에 들어서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추석 명절을 맞은 민속현장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인파가 찾는 반가운 현상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요즘이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지난 1일부터 다양한 민속 행사 및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 아래 민속박물관)은 추석 연휴 집중기간인 6일과 7일만 6만 여명(박물관 추정집계)이 찾았다. 명절과 상관없이 박물관을 찾은 외국 단체관광객들도 인파에 놀라와 하는 모습들이었다.
7일 박물관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박물관을 구경하러 왔는데 사람이 많아서 관람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명절을 맞아 박물관을 찾은 수많은 인파들에 놀랐다. 모두들 행복해 하는 모습에 나도 행복해지는 듯했다”고 명절을 즐기는 한국사람들의 모습에 신기해 했다.
이 날은 특히 추석을 맞아 박물관 대강당에서 5시간에 걸쳐 추석굿이 준비된 날이었다. 우리 명절은 조상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귀성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차례이고, 성묘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요즘 빠져 있다. 그것은 명절 때마다 마을 단위로 열리던 마을굿이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박물관에서 공연형식을 빌어 명절 때마다 굿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7일 굿은 서경욱(최영장군당굿보존회) 만신이 이끄는 황해도식 굿으로 열렸다. 5시간 동안 굿이 열린 대강당은 통행로까지 관람객들은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굿을 지켜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굿을 지켜본 시민 이규여(동국대 대학원)씨는 “굿은 지금까지 두 번째로 경험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처음이다. 공연 형식이어서 그런지 막연하게 가져왔던 두려움이 없어서 좋았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공연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마을굿은 예로부터 지배층의 방해와 압박의 대상이었다. 비교적 전대에 비해 민초의 지위를 높인 조선시대에도 마을굿에 대한 지배층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그 명맥을 끊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던 것이 마을굿이었다. 마을굿은 일본 총독부의 끈질긴 탄압에도 꿋꿋하게 이어왔으나, 새마을운동 시기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현재 마을굿, 대동굿은 농촌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개인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개인 굿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감시를 받았고, 그것은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굿에 대한 편견을 낳게 한 요인도 되었다. 모든 종교로부터 발생한 문화현상들이 그렇듯이 굿 역시 단지 종교적인 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반드시 기독교인만 듣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의미이다.
민속박물관인들 그 동안 굿을 개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나 그 결실을 서서히 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어차피 대동굿이라면 강당이 아닌 너른 마당에서 벌이는 것이 그 취지에 맞는 일이다.
민속박물관 이관호 학예연구관은 “그것이 옳은 것은 알지만, 과거에 민원이 적지 않았기에 강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앞으로 대동굿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내년 정월 설에는 마당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신명난 굿을 즐기게 되기 기대한다. 강당에서 열린 굿임에도 불구하고, 공식 굿을 마치고 모든 사람이 신명을 푸는 뒷풀이 난장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흥겨운 장단놀음, 춤놀음을 흥겹게 놀았던 것을 보면 분명 굿은 마당으로 나가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 민속박물관 곳곳에서는 각종 민속놀이 체험과 공예체험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3,40대 젊은 부모들에게 아련한 추억이 깃든 혁필(가죽붓으로 그리는 그림)로 가훈을 받기도 하고, 민속박물관 건물을 배경으로 무료 즉석사진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 부모 손에 이끌려 박물관을 찾은 많은 어린이들이 가장 행복하게 빠져든 것은 탈만들기, 민화그리기, 솟대깍기, 한지로 반짇고리 만들기 등 전통공예를 직접 체험해보는 프로그램들이었다. 특히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모습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풍속도였다.
민속은 유적과 유물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작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특성 있는 절기 풍습이 전래되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비록 큰 명절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하루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민속현장을 찾는 것은 중요한 현상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역할과 기능의 확대에 따라 그 인구수는 더욱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