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했다. 창간 60주년을 맞은 <경향신문>과의 특별회견에서 그는 여당의 비극은 분당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분당사태 때문에 산토끼는 고사하고 집토끼마저 잃는 비극이 초래됐다고 했다.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그다. 지난 3일 최경환 비서관의 논평을 통해 "일절 정치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랬던 그가 일주일도 채 안 돼 여당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경향신문>의 설명은 이렇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초 "정치문제는 (언급) 안한다"고 했으나 "정당보다는 지금 민주당, 열린우리당에 대한 얘기"라며 그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당의 아킬레스건 건드린 DJ
뜻은 알겠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본뜻이 어떻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문제를 거론했다. 정계개편 주장이 몸풀기에 들어간 민감한 시기에, 여권의 예민한 부위인 분당문제를 건드렸다. 파장이 작을 리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책임문제를 거론했다. 대상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고, 노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서 민주당의 전통과 정강정책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국민한테 약속했다"고 전제한 그는 "(대선 때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찍어준 사람들한테 승인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표를 찍어준 사람들은 그렇게 (분당하길)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한 분당 때문에 '여당의 비극'이 빚어졌다는 그의 비판은 집토끼부터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건 새로울 게 없다. 그는 이미 '전통적 지지층 복원'을 주장한 바 있다. 새로운 건 그게 아니다. '전통적 지지층 복원'의 선결조건으로 분당사태에 대한 깔끔한 정리를 사실상 주문한 게 새롭다. 그러려면 노무현 대통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정리가 긴요하다.
가능할까? <조선일보>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 2일부터 3일까지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과 핵심 당직자, 3선 이상 중진 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다. '현재 열린우리당 체제로 내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24명 중 22명이 '희망이 없다,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이 또한 새로울 게 없다. '비극'이 '희망이 없다'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 현실 진단은 같다. 문제는 해법이다. 노무현 대통령 문제다.
'신당 창당시 노 대통령은 배제해야 한다'는 응답이 4명, '자연적으로 분리될 것'이란 응답이 3명, '인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노 대통령이 새판짜기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응답이 8명이었다. 또 '노 대통령과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가 3명, 입장 유보가 6명이었다.
이런 응답을 두고 <조선일보>는 노 대통령의 역할에 관해 부정적 응답이 주를 이뤘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문제의 중심, 노무현 대통령
최다수를 차지한 응답, '인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은 이중적이다. '밀어내지는 않겠다'는 의지와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바람이 동시에 담겨있다. 그래서 유동적이다.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이 관여하는 상황이 연출되면 이들은 어떤 자세를 취할까? 또 입장 표명을 유보한 6명은? 분화의 경우 수는 많고, 유동적인 상황은 여전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관여를 하건 하지 않건 신당 창당에 성공한다고 해서 전통적 지지층이 복원되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지도 미지수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지난 6일 보도된 MBC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계개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67.3%가 공감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입장이 확연히 갈렸다. '헤쳐모여'가 34.1%, 한나라당과 민주당 통합이 21.5%,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통합이 13.7%였다.
국민의 뜻이 뭔지는 자명하다. 정계개편은 필요하지만 퇴행적 정계개편은 반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퇴행'의 기준은 지역주의다.
국민의 뜻이 이렇다면 '비극' 해소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역주의 회귀를 경계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정계개편, 즉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과정으로서의 헤쳐모여식 신당 창당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노무현(세력) 배제'의 당위와 위력이 갖춰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헤쳐모여를 주장하는 범여권 인사들 가운데 새로운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미래 한국 경영전략을 실천매뉴얼로 제시하는 범여권 인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야권에서 거론되는 한-민통합이 지역주의 해소와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화해라는 명분을 앞세워 더 실제적인 정계개편 모델로 운위되는 형국이다.
'서부연합'의 재현?... 여권의 비극
이런 상황에서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 전 총리를 축으로 하는(경우에 따라 국민중심당도 끼워주는) 헤쳐모여는 신선도가 떨어진다. 양은 늘지만 질은 그대로다. 당명은 바뀌겠지만 '서부연합'의 구태를 벗겨내지는 못한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조합이 지역 표심을 얻는다 해도 '전통적 지지층'의 한 축인 개혁 표심까지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개혁의 좌표가 뭔지조차 흐트러져 버린 게 작금의 상황이다.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대형 사안들이 개혁 대 반개혁 구도로 재단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다. 그래서인지 여권은 딱 부러지는 입장을 내놓지 못한다. 이게 현실이다.
'여권의 비극'은 세력이 사분오열된 것만이 아니다. 미래 한국의 희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이 더 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