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9개월 만에 100만부 판매(밀리언셀러)의 신화를 만들었던 <마시멜로 이야기>가 대리 번역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출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출판번역계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마시멜로 이야기>는 정지영 아나운서가 아니라 김아무개씨가 번역한 것"이라며 "정 아나운서는 이름만 빌려주었다"고 '대리번역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대리번역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출판계 내부에서도 그동안 묵인해온 대리번역 관행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전망이다. 이와 함께 스타를 앞세워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집착한 출판사의 상업주의도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지영(32) 아나운서는 번역은 하지 않고 이름만 빌려주었다는 점에서 도덕성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밀리언셀러로 오른 데 정 아나운서의 높은 인지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정 아나운서 측은 "황당한 주장"이라며 대리번역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정 아나운서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직접 책을 번역했다고 밝혀왔다.
출판번역계 한 인사 "정지영 아나운서는 이름만 빌려줬다"
앞서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의혹을 제기한 출판번역계 한 인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제가 밝힌 내용은 모두 실제 번역자인 김씨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출판사인 한경BP 측에서 김씨에게 '번역자를 다른 사람으로 해도 되겠느냐'며 동의를 구한 뒤 김씨와 번역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 아나운서는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남편이 <마시멜로 이야기>를 권해줘 읽다가 번역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출판사측은 김씨와 매절(200자 원고지 1매)당 번역료 3500원의 계약을 맺고 정 아나운서와도 정식 번역계약을 맺어 인세를 지급해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출판번역의 경우 역자나 저자의 이름에 따라 판매량이 좌우되기 때문에 대리번역을 시킨 뒤 유명인사를 번역자로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출판번역계에서 영어나 일어의 경우 대리번역의 관행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출판계에서 대리집필·번역 관행은 굉장히 흔하다"며 "특히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 같은 경우 출판사들이 마케팅을 위해 신인번역가들에게 대리번역을 공공연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의혹은 번역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책을 출판한 곳이 대형출판사라 아무도 문제삼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정 아나운서는 '하룻밤에 (원서) 100쪽을 다 번역했다'고 했는데 이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라며 "정식번역은 하루에 10쪽 하기도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번역자 추정 김씨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처지 아니다"
<오마이뉴스>가 다각도로 취재를 벌인 결과, <마시멜로 이야기>를 실제 번역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사는 현재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로 확인됐다.
김씨는 국내외 대학과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일반기업에서 간부로 일했으며, 2000년부터 전문번역가로 활동해왔다.
김씨는 지난 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저는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처지가 아니다"라며 말문을 닫았다. 다만 그는 "대리번역은 출판계의 관행"이라며 "제가 <마시멜로 이야기>를 번역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이러한 관행은 고쳐져야 한다"고 강조해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김씨는 최근 주변인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원서가 출판되기 훨씬 전인 9월 초순경에 번역을 끝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 입으로 공개해야 하는 불상사만큼은 피할 생각이다" 등 자신의 소회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또한 <마시멜로 이야기> T/F팀에 참여했던 한 출판계 인사도 "(책 번역과 출판 등은) 조직(출판사)에서 한 일"이라며 "(대리번역 의혹은) 조직에서 물러난 제가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사실확인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 출판사 안에는 '마시멜로 이야기 T/F팀'이 꾸려져 있었다"며 "그것 외에 세부적으로 알고 있는 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의 경우 대필이 종종 있지만 대리번역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강조한 뒤, "번역자가 번역해온 대로 출판하지는 않는다"며 "편집자의 가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출판사 "너무 잘 나가니까 그런 소문 나도는 것 같다"
하지만 <마시멜로 이야기>를 펴낸 한경BP측은 대리번역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편집책임자인 최현문 편집부장은 지난 2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실과 다르다"며 "우리하고 정식으로 번역계약을 해서 정지영 아나운서가 직접 번역한 게 맞다"고 의혹을 일축했다.
그는 "출판계에서는 한 군데가 너무 잘 나가면 배가 아파서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돌게 마련"이라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하도 오랫동안 올라 있어서 그런 소문이 돌아다닌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마시멜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 전인 지난해 7월말께 이미 소프트 카피본(책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에 나오는 복사본)으로 정 아나운서에게 번역을 의뢰했다"며 "정 아나운서는 9월께 번역을 마치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정 아나운서에게 지급한 인세와 관련 "신인 번역자는 보통 인세를 주지 않고 매절로 번역료를 계산하지만 정 아나운서는 유명하고 이미지가 좋기 때문에 정책적인 배려를 했다"며 "(신인이 아닌) 일반 번역자 수준으로 인세를 줬다"고 밝혔다.
그는 "정 아나운서와 함께 <마시멜로 이야기> 두번째 출판 등 후속계획을 다 잡아놓고 있다"며 "오는 11월에 저자를 국내로 초청해 정 아나운서와 함께 인터뷰를 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와중에 이런 얘기(대리번역 의혹)가 나오는데 공인으로서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이것이 기사화된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 정지영 아나운서 개인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정 아나운서측 "이미 초벌번역된 원고를 참고해 직접 번역했다"
정 아나운서 측은 "지난해 7월 출판사로부터 원서를 받았다"며 "이후 남편의 권유도 있어서 틈나는 대로 직접 번역했다"고 해명했다.
정 아나운서측은 "원서를 받고난 뒤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데 참고하라'며 초벌번역된 원고를 건네주었다"며 "그걸 참고로 번역을 다시 했다"고 강조했다. 정 아나운서측은 "대리번역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라며 거듭 대리번역 의혹을 일축했다.
이 '초벌번역'과 관련, 다만 최현문 편집부장은 "<마시멜로 이야기> 내용을 요약한 자료"라며 "본격적인 번역을 하기 전에 전문번역가에게 리뷰를 맡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초벌번역이 김씨의 번역본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 아나운서는 그동안 미국 유학파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직접 번역했다고 밝혀왔다.
그는 지난 5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장이 쉽고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어서 괜찮았다"며 "미국 유학파인 남편의 도움도 받았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물어봐서 표현을 부드럽게 고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다른 인터뷰에서 "내가 번역한 책이 인기있는 게 믿기질 않아 요즘도 가끔 서점에 가서 몰래 슬쩍 보고 온다"고 말하면서도 '또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응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못하겠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리번역 의혹을 제기한 인사는 "실제 번역자인 김씨는 초벌번역이 아니라 출판될 번역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출판사측에서 초벌번역을 해달라고 한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출판사에서 초보번역가의 동의를 구하거나 혹은 구하지 않고서도 유명인의 이름을 번역자로 붙이는 경우는 많이 봤다"며 "하지만 초벌번역을 시켜서 다시 정식 번역할 사람에게 '참고하라'고 주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번역에 3개월, 출간에 1개월?..."T/F팀이 있어 가능했다"
출판사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출판사측은 번역할 원고(소프트 카피본)를 지난해 7월말께 정 아나운서에게 넘겼다고 했다. 그런데 정 아나운서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번역하는 데만 3개월 걸렸다고 밝혔다.
정 아나운서의 진술이 맞다면 번역원고는 지난해 10월말께 출판사에 전달됐을 것이다. 10월말께 번역원고가 들어왔다면 삽화까지 들어간 <마시멜로 이야기>의 11월 1일 출간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출판사측은 번역된 원고가 지난해 9월께 들어왔다고 밝혀 정 아나운서의 진술과 차이를 보였다.
지난 5월 <스포츠조선>은 정 아나운서과 인터뷰한 기사에서 "석달 걸렸는데 벼락치기 공부하듯 주말에 몰아서 했다, 하룻밤에 100쪽을 하기도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몇가지 의문점들과 관련, 최현문 편집부장은 "번역원고는 들어온 지 10일 만에 출판이 가능하다"며 "<마시멜로 이야기> T/F팀에서 집중하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정 아나운서는 하룻밤에 100쪽을 번역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기자가 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리번역 의혹을 제기한 인사는 "삽화가 들어가는 경우 보통 번역이 나온 다음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리는 데만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며 "정지영 아나운서가 주장하는 대로 7월 초에 받아서 석 달 번역해서 10월 초에 넘기고, 삽화 작업이랑 몽땅 해서 10월 말에 책이 나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