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하루를 가장 먼저 여는 나라들이 남태평양에 흩어져있는 섬나라들이다. 날짜 변경선 근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000년에는 뉴 밀레니엄의 첫 일출을 보기위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타고난 천성이 워낙 낙천적인 남태평양국가 국민들은 지난 3세기 동안 서양 여러 나라의 식민지지배를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나라 인구 90% 이상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그 간접적인 증거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남태평양지역을 '호주의 지역'으로 지칭하면서 역내 질서유지를 주도하려 드는 호주와 남태평양 국가들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알토란 같은 호주의 경제원조도 마다하고 호주대사를 추방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호주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다. 상대국가의 법무장관을 체포해서 호주법정에 세우려 시도하는 가하면, 군인의 숫자를 2600명이나 증원해서 남태평양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하워드 총리의 내정 간섭적 발언
급기야 존 하워드 총리는 어제(10월16일) 의회답변을 통해서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군도가 호주의 경제원조를 계속 받고 싶다면 부패를 척결하고 정부 인사를 제대로 하라, 뿐만 아니라 경제운용도 효율적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다분히 내정간섭에 가까운 발언이다. 인구 2천만 명의 큰(?) 나라 호주가 인구 2만 명(나우루)에서 수십만 명(솔로몬군도, 피지,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등)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을 상대로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일삼는 걸 지켜보면서 언뜻 북한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호주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태평양국가들이나 미국에 의해서 경제봉쇄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행진'을 벌여야하는 북한의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하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압박을 당하는 작은 나라들이 '맞짱 뜨자'며 대드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뜻 한가롭게 보일 정도로 태평하게 지내는 남태평양 국가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남태평양의 골목대장'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까지 호주가 영향력 행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9년 전 일을 왜 이제..."
지난 4월 말, 솔로몬군도는 내전에 가까운 혼란을 겪은 끝에 호주에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마나세 소가바레 총리가 취임했다. 그후 호주와 솔로몬군도의 외교관계는 계속 삐걱거리면서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소가바레 총리가 내정간섭을 이유로 호주대사(고등 판무관)를 추방한데 이어서, 호주 또한 지난 1997년 바누아투에서 아동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줄리안 모티(41) 솔로몬군도 법무장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 모티는 "친구들과 함께 아동섹스관광을 다녀왔다"고 호주경찰에 자백한 바 있다.
이를 이유로, 호주정부는 소가바레 수상의 측근이며 피지 출신 인도계 변호사인 모티의 해임과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가바레 총리는 모티의 체포가 솔로몬군도에 대한 호주의 심각한 주권침해라며 버티다가 결국 해임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을 삭이지 못한 소가바레 총리는 호주국영 ABC-TV를 통해서 "지난 9년 동안 문제 삼지 않았던 일을 이제 와서 거론하는 건 구실에 불과하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나를 호주정부가 보복하는 것"이라고 쏘아붙였고, 크리스 엘리슨 호주 사법장관은 "계속해서 조사를 해온 사건이며 아동성범죄는 악질적인 범죄"라고 맞받았다.
'007작전' 무색한 솔로몬군도 법무장관 탈출 작전
한편 줄리안 모티의 행적을 보면, 그가 남태평양국가들을 종횡으로 넘나든 것을 알 수 있다. 피지에서 인도계로 출생해서 호주에서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후 시민권을 얻었고, 바누아투에서 저지른 범죄로 파푸아뉴기니에서 체포된 것. 그는 극적인 탈출 끝에 지금 솔로몬군도에 머물고 있다.
모티를 파푸아뉴기니에서 호주로 압송하려던 호주 경찰당국의 시도는 그가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려 실패로 돌아갔다. 파푸아뉴기니 주재 솔로몬군도 대사관에 피신 중이던 모티가 야간을 틈타서 파푸아뉴기니의 군용기를 타고 솔로몬군도로 탈출해버린 것이다.
두 나라 모두 부인하고 있지만, 모티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군도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남태평양의 맹주를 자임하던 호주는 스타일을 구겼고, 그동안 호주의 내정간섭이 불만이었던 두 나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주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모티가 타고 탈출한 비행기가 호주에서 원조한 군용기라는 사실이다. 호주가 군용기 사용과정을 강하게 따져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솔로몬군도 총리 "호주, 너나 잘 하세요"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모티 탈출사건과 관련하여 "마이클 소마레 파푸아뉴기니 총리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전말이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으면 다음 달로 예정된 소마레 총리의 호주방문은 취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호주는 하는 수 없이 솔로몬군도의 소가바레 총리에게 모티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소가바레 총리는 8억 호주달러(약 6400억 원)의 원조중단 경고도 무시했다. 오히려 솔로몬군도에 주둔 중인 호주군인들까지 추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화가 잔뜩 난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지난 16일 의회보고를 통해서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군도의 현 정치지도자들은 부패와 무능으로 범벅이 되어 나라의 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다우너 장관의 무례한 발언에 다혈질의 소가바레 솔로몬군도 총리가 발끈하고 나선 건 당연지사, 시쳇말로 "호주, 너나 잘 하세요"라면서 거세게 반격을 가했다.
그는 "남의 나라 법무장관을 압송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호주가 솔로몬군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원조도 필요 없다"면서 "호주정부가 과거에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상대로 밀수출을 하면서 검은 돈을 건네준 사실을 우리도 안다"고 비아냥거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캐빈 러드 그림자내각(야당이 구성한) 외무장관은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군도는 룰을 지켜라, 그리고 다우너 외무장관도 찬물로 샤워를 좀 해서 열을 식힌 다음에 대화하라"고 충고했다.
한편 호주의 <녹색좌파(Green Left) 저널> 최근호는 '남태평양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골목대장노릇을 하고 있는 호주가 대가를 단단히 치르고 있다, 호주는 영국의 대를 이어서 신 식민지 지배를 획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 유럽의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려온 솔로몬군도 | | | | 호주 동북쪽에 위치한 솔로몬군도라는 이름의 인구 43만 명(1997년 인구조사)의 작은 나라가 있다. 파푸아뉴기니 바로 옆에, 무려 99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여서 군도(群島), 또는 제도(諸島)라는 명칭이 붙었다. 영어로는 Solomon Islands.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솔로몬이다. 어쩌다가 그런 이름을 얻게 됐을까?
1597년 스페인 탐험대가 낯선 섬에 도착했다. 그때 황금빛 나뭇가지 지팡이를 든 노인이 나타났다. 마치 솔로몬 같았다. 그 후로 그 섬은 '솔로몬의 섬'으로 불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나중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그곳을 다시 찾아갔지만 말라리아의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버렸다.
그로부터 약170년의 세월이 흐른 1767년, 영국인들이 그곳을 식민지로 삼았고 영국의 수탈은 가혹했다. 백인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원주민들이 급기야 백인을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져 식인종의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자 영국은 선교사들을 앞세우는 작전을 펼쳤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재 솔로몬군도 인구 96%가 기독교인이다. 1978년 솔로몬군도는 마침내 독립하게 됐다. 여전히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국가수반인 허울뿐인 독립이지만….
그후 30년 가까운 역사도 암울한 건 마찬가지다. 무진장한 자원을 가진 나라지만 강대국 기업들의 자기잇속만 챙기는 행태 때문에 솔로몬군도는 1인당 국민총생산 3000 달러의 가난한 나라가 됐고,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의 무차별 공략으로 국민 60% 이상이 당뇨병을 앓는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