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하면서 참여정부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기원했다. 그러나 집권 4년째인 지금 노무현 정부가 성공을 거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노무현 대통령의 4대 비극의 다음과 같다.
[민족] 미국 일극체제하 한미 양국 대북정책의 엇갈림
[경제] 97년체제하 대중의 민생요구와 신자유주의의 불일치
[정치] 무능을 강제하는 레짐과 정치혁신의 부재
[주체]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무좌표와 참여정부의 이탈
이 4대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비극으로 이름붙인 이유는 아직도 원칙으로 돌아갈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눈을 부릅뜨고 국민의 여망에 몸을 던지는 개혁가의 미학이 살아 있다면, 그리고 평화개혁세력 전체가 국민과 시대의 명령에 의해 새로 태어난다면, 미래는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미국 일극체제하 한미 양국 대북정책의 엇갈림
민족문제, 대북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상수였고 한국은 변수였다. 각각 정권의 성격이 어떻고 두 나라의 정권 조합이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길로 걸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클린턴과 김영삼, 클린턴과 김대중, 부시와 노무현.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언급하여 민족우선론을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후 YS는, 북한의 남북 특사교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핵을 가진 북한하고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북핵위기가 불거진 것은 94년 6월. 1년 전인 93년 3월 북한이 일방적으로 NPT 탈퇴를 통고한 이후 1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북미간의 협상은 1994년 6월 13일 북한이 결국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함으로써 결렬되고 북핵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미국의 전쟁감행 전략에 의한 2차 한국전의 위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6월 14일 페리 국방장관이 소집한 군 수뇌부 회의에서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은 작전계획 5027 실행방안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고 그 시점에서 페리는 제2의 한국전이 불가피함을 직감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당시 클린턴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해왔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개인자격으로 방북을 단행한다. 6월 16일,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동결'시키라는 카터의 요구에 김일성은 잠정적으로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으며, 미국이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항구적인 동결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6월 16일,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북제재에 관련한 안보회의를 소집해 군비증강 등 전쟁준비를 검토하고 있었다. 클린턴은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들여 "북한이 진정으로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위급 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차 한국전의 위기는 소멸되었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하게 나가면 전쟁이 난다고 말리고 유화적으로 나가면 북한에 휘둘린다고 미국을 비판하곤 했다.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은 동맹국가인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사활이 걸린 북한 핵 문제를 미국과 북한의 문제로 치닫게 만들었으며 협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한국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김영삼 정부는 위기가 고조되던 그해 6월 13일,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전시 동원에 대비한 사상 최대 규모의 민방위 훈련을 하겠다고 발표해 국민들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증시는 이틀만에 25% 곤두박질쳤고 국민들은 쌀과 라면, 양초 등을 사재기하기 위해 가게로 몰려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평양 방문에 앞서 서울에 들를 예정이었던 카터에 대해서도 그의 방북이 "시기적절하지 못한 것"이며 북한의 "지연전술"을 부채질할 수 있다고 말하며 전쟁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그의 행보를 마땅치 않아 하기도 했다.
97년 평화적 정권교체에 의해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 '햇볕정책'을 내건 김대중 정부는 대북 전략가인 임동원을 앞세워 미국의 대북정책을 조정하게 만들고 그것은 대북정책조정관 페리의 보고서로 나타났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99년 10월 페리보고서의 한 문장을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과 한국이라는 변수의 상호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정부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김 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지도자로서, 우리의 동맹국이며 또한 미군 3만7000명이 주둔하고 있는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김 대통령의 의견과 통찰은 한반도에서의 미 안보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심적인 요소라 하겠다. 어떠한 미국의 정책도 한국정부의 정책과 조율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우리에게 94년 당시와는 크게 다른 상황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페리보고서가 채택된 후, 클린턴의 방북과 북미수교까지 검토되었던 2000년, 햇볕정책의 최고의 정점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관계는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2000년 11월 미국의 43대 대통령으로 부시가 확정되자 남북관계는 다시 불안해진다. 언감생심 북미수교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고 포괄적 이중전략 또는 포용정책은 무시되었다. 부시의 양대전쟁 전략(이라크와 북한)은 날로 구체화되어 갔다. 2001년 9·11 테러는 부시의 대북 강경노선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2002년 1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북한 김정일 정권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2003년 3월 이라크전 개전으로 양대전쟁 전략은 노골화되었다.
한국의 2002년, 효순·미선 사건과 월드컵 분위기는 대선정국에서 반미 또는 극미감정을 점화시킨다.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노무현은 "사진 찍으러 미국을 방문하지는 않겠다"고 발언한다. 미국에 대해서 할말을 할 것 같은 지도자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면서 대통령 당선을 가능케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취임 후 단행한 대북송금 특검과 잦은 대미 발언의 실수들은 일관성없는 정책과 더불어 미국의 불신을 자초, 대북정책에서 한국의 이니셔티브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2003년 5월 첫 번째 방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반미혐의'를 확실하게 벗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소위 '정치수용소' 발언의 실수를 범한다.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2003년 5월 13일,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최 만찬연설)
핵심지지층에서는 '대미 저자세 굴욕외교' 논란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후 이 발언을 합리화한 '한신의 처신' 발언으로 미국은 노 대통령을 이중적인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및 한미관계에서 한국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민족문제나 남북관계에 대해 '자주'라는 표현은 많이 하면서도 실제 무게중심은 한미동맹에 있었다. 6자회담이나 개성공단 등 모든 정책을 미국의 주도권 아래에 두었고 북핵과 경협의 연계정책은 정경분리의 대북정책 원칙에도 어긋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은 결과적으로 햇볕정책을 미국의 통제하에 두자는 것으로서 한국의 자리를 내준 꼴이 되었다. 그사이 국내 평화세력의 분열과 해체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첫 번째 비극, 그것은 네오콘으로 무장한 부시 정권의 존재와 햇볕정책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세력의 해체를 자초한 참여정부의 엇갈림이었다.
2. 97년체제하 대중의 민생요구와 신자유주의의 불일치
1997년 이후 사회의 변화를 빗대어 '불안사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라토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받아들인 미국식 세계화는 냉혈한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 속에서 삶의 위기를 일상화한, 불안보다 강렬한 새로운 '공포'였다.
U자형 사화양극화는 여러 가지 계기에 의해 진척되었고 사회 전부문에 걸쳐 일어났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성장률의 둔화', '양질의 일자리 감소', '산업부문간 연계의 약화'에 있다. 그 속에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하고 주식시장이 물결치는 약탈경제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증대하면서 서민경제의 몰락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97년 이후 9년이 흘렀다. 87년 체제가 정치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담보하고 그나마 국가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확대한 것이라면 97년 체제는 시장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고 국가를 시장에 굴복시키고야 만다. '시장', '친기업', '경쟁', '유연화', '세계화' 같은 담론들이 한국사회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87년의 국민적 열망이 직선제에 그쳤다면 97년의 국민적 열망은 평화적 정권교체에 그쳤다. 그리고 2002년 변화와 개혁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IMF 이후 일상적 삶의 위기에 선 국민들의 열망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가를 통해 서민경제의 부흥,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그렸던 대중의 열망은 재정과 조세, 기업정책과 노동정책에서 절망에 부딪히게 되었다. 개혁의 성격은 경제민주화개혁이나 민생개혁이라기보다는 시장만능주의를 제도화 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개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 역시 비대칭적 역관계에 의해 사양산업뿐 아니라 성장산업에서의 위기감도 고조시키면서 국민 모두의 삶의 조건들을 악화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두 번째 비극, 그것은 97년 체제하에서 신음해온 민초들의 열망과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참여정부 정책과의 엇갈림이다.
3. 무능을 강제하는 레짐과 정치혁신의 부재
진보개혁의 대위기이다. 부패한 보수보다 무능한 진보를 때리는 국민들은 5·31 지방선거에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사실상의 선거탄핵을 단행하였다.
비단 사태는 열린우리당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 12%, 민노당 7%, 민주당 5% 수준의 '배제정당'으로의 전락. 그사이 한나라당은 45%의 정당지지도를 구가하고 있다. 산술적으로 3당의 지지도를 합산해도 한나라당의 절반을 웃도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한나라당이 국가를 맡을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거나 세부적인 정책에서 한나라당 편을 드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진보개혁, 평화민주세력의 자멸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가. 삶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무능하다는 것은 이념과 비전과 전략의 부재를 이르는 다른 이름이고, 그리고 이를 실현할 인적 제도적 수단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87년 민주화시대가 합의한 헌법은 그런 의미에서 미완의 민주헌법이다. 대통령에 집중된 나머지 정당과 국회, 시민사회의 민주적 기능을 본래적 지위에 위치시키지 못했다. 이에 따라 미국식 양당정치도 유럽식 대중정당체제(다당제)도 수립하지 못한 채, 관료-재벌-집권세력 동맹이라는 보수레짐하에 개혁정권이 흡수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97년 체제는 미국식 세계화의 체제내화 속에서 국가의 역할이 더욱 축소되었다. 삶의 위기 속에서 정치와 국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거꾸로 현실에서의 정치와 국가의 역할은 산술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 대한민국 정치에는 정당이 아니라 '여와 야'만 존재한다. 대통령을 에워싼 관료들이 정책을 지배하고, 국회에서는 정당이 아닌 여당이 거수기 노릇을 반복하며, 한나라당은 국회법이 보장한 의사진행 합의권력을 이용해 발목잡기 정략정치에 몰두한다. 민노당은 13%의 득표에도 불구하고 의석수 규정에 의해 원내교섭권조차 없다. 갈등은 대표되지 못하고 조정되지 못하는 무능의 수레바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무능의 정체는 바로, 현실의 레짐 즉 대통령단임제, 행정부의 국가예산·정책 지배권, 헌법, 정당법, 국회법 등에서 정당정치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 6월의 비극,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했다. 2004년말, 4대 개혁입법이 무산되면서 개혁정치가 실종되자 여권 내에서는 두갈래의 큰 흐름이 조성되고 있었다. 전통적 호남 지지층의 복원과 의회다수파 복원을 위해 민주당을 흡수하자는 견해와 개혁의 진전을 위해 민노당을 포함한 소연정을 추진하자는 견해였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다른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바로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대연정'이었다. 청와대는 보수레짐의 핵심을 '경상도'로 판단했다. 정치개혁의 성격도 경상도 내에서 개혁세력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제도화하는 것 - 중대선거구제 였다. 여기에 청와대의 개혁통치 로드맵에 대한 자신감도 작용한 것이 바로 '대연정'이었다. 연말까지 지지층의 핵분열이 일어났고 여권내부에서는 탈노무현 흐름이 생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세 번째 비극, 그것은 정당정치를 무능의 수레바퀴에 갇아둔 레짐과 이를 극복하려는 진정한 정치혁신의 부재에 있다.
4.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무좌표와 참여정부의 이탈
2007년 대선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초선거라면, 그래서 새로운 보수와 새로운 평화개혁의 국가발전전략 경쟁이 불을 뿜는다면, 문제는 평화개혁세력이다. 왜냐하면 보수세력이 네오콘과 함께 대북대결주의와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사실상 현재의 레짐을 고집하고 있다면, 평화민주개혁 세력의 미래비전은 당연히 민족과 민중의 시대적 요구에 철저하게 복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87년 이후 97년까지 10여년간 평화민주개혁세력은 제도권 내에서 평화민주연구회(평민련), 민주개혁정치모임,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등으로 존재를 입증하여 왔다. 그러나 상대적 진보라고 평가되는 김대중을 추종하거나 영남개혁세력을 포용한 김영삼을 추종하거나 하면서 이후 10여년간 평화민주개혁세력이 분열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87년의 양김분열이 민족민주세력의 제도권 진출사의 원죄라면, 97년 정권교체 이후 평화개혁세력의 권력진출과 더불어 진행된 균열은 스스로 감당해야할 본죄이다.
그런 면에서 2002년 노무현의 집권을 두고 환호했던 것은 드라마틱했던 집권의 기적이라기보다는 평화개혁세력의 단독집권이라는 의미에서였다. 2004년 탄핵을 딛고 대대적인 의회진출이 성사되자 개혁정치의 본격화에 국민적 기대가 모아졌다. 152석의 과반수 여당이 탄생했고 민주노동당은 13.1%의 지지로 원내 3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구냉전세력의 몰락은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주인없는 당이었다. 토대의 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고 당을 주도하는 리더십도 없었고, 관료와의 정책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정책세력도 없었으며, 개혁입법과 정치혁신의 과제에 대해 통일된 전략전술도 없었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정치에 끌려다니거나 관료들의 정책지배에 순응할 뿐이었다. 정치이슈든 입법과 정책이든 매 사안마다 다른 소리가 나왔으며 '개혁이냐 실용이냐', '집권당이냐 개혁당이냐', '친노냐 비노냐'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당내에서 '잡탕정당' 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민주노동당도 교조와 교조, 교조와 현실사이의 갈등에 매몰되면서 또하나의 기성정치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사이 청와대와 정부는 국민과의 개혁약속보다는 '실용주의', '좌파 신자유주의'로 경도되었고 정당의 대표기능 강화보다는 통치의 효율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네 번째 비극, 그것은 바로 평화민주개혁세력의 균열과 무좌표, 리더십의 부재에 있었고 더불어 참여정부의 통치효율주의에서 비롯된 세력이탈이라는 어긋남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평화민주개혁세력은 이 4대 비극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최민식 기자는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정세분석실 부국장,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 열린우리당 원내기획부실장 등을 지냈으며 지금은 정치평론 및 자유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