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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사진. 오른쪽 위 망원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서기종 전 제1전대장이다. 바로 아래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제2전대장 정원도씨. 이 사진은 1954년 9월경 일본 순시선이 접근하자 박격포 공포탄을 쏘고 난 뒤 기념으로 촬영한 것이다. 서기종씨 등은 "일본 순시선과의 총격전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1954년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사진. 오른쪽 위 망원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서기종 전 제1전대장이다. 바로 아래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제2전대장 정원도씨. 이 사진은 1954년 9월경 일본 순시선이 접근하자 박격포 공포탄을 쏘고 난 뒤 기념으로 촬영한 것이다. 서기종씨 등은 "일본 순시선과의 총격전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독도박물관 자료사진.


"일본군하고 총격전? 없었어요. 새까만 거짓말이에요. 그랬으면 전쟁났지…."

지난 9월 29일 경북 포항에서 만난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수호 전투사(戰鬪史)'를 묻자 박병찬(79세)씨는 대번에 손사래부터 치고 나왔다. 1954년부터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독도경비를 했던 그는 "일본 순시선은 먼 바다에서 동태만 살피고 돌아갔을 뿐 보이지도 않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현재까지 '사실'로 기록된 독도의용수비대의 전공은 꽤나 화려하다. ①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하도마루호 나포(1953년 6월) ②일본 순시선 해구라호 발포 위협(1953년 7월) ③일본 경비정 3척 격퇴(1954년 4월) ④일본 순시선 오키호 총격전으로 격퇴(1954년 8월 23일) ⑤일본 순시선 3척, 항공기 1대 발포 격퇴(1955년 11월) 등 수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는게 공식 역사다.

하지만 이런 전과는 부풀려지고 끼워맞춘 것으로 확인됐다.

수비대 결성하기 1년 전에 일본군과 전투?

우선 독도의용수비대가 구성되기 전부터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4월경 미역채취를 위해 서도에 상륙하면서 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관련 기사 참고). 그런데 전투는 그보다 한해 앞선 1953년 6월부터 벌어진 것으로 돼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을 무리하게 끌어들여 '전공'으로 만들다보니 날짜와 상황이 뒤죽박죽돼버린 것이다. 전직 수비대원들과 경찰관들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53년 6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하도마루호를 나포했다는 기록은 홍순칠 대장의 <다큐멘터리 독도수비대>에서조차 다르게 나온다.

이 책에서 실습선이 나포됐다는 시기는 1953년이 아닌 1954년 8월 14일, 독도의용수비대 1진 6명이 최초로 상륙한 뒤 벌어진 일이다. 실습선의 이름도 '다이센마루'로 기록과는 다르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사
구분날짜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사 비고
11953.04.20독도의용수비대 창설, 제1진 15명(수비대장 홍순칠) 독도 서도 상륙생존자들의 증언과 홍순칠 대장의 기록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연도는 1954년 4월경이다.
21953.06.24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하도마루호) 독도 150m 해상에서 나포, 귀환 조치수비대원들은 일본 실습선 하도마루호를 나포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31953.07.12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해구라호) 발포 위협, 퇴함시킴일본 순시선 ‘해구라호’에 총격을 가한 것은 독도의용수비대가 아니라 울릉경찰이었다(최헌식 전 경사 외)
41954.04.22일본 경비정 3척 독도 접근, 독도의용수비대 격퇴독도의용수비대가 실제 한 일인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홍순칠 대장의 기록뿐이다.
51954.05.18독도의용수비대, 독도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 새김
61954.07.15목조포 제작 설치
71954.08.23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오키호) 독도영해 침범, 총격전으로 격퇴수비대원들은 일본 순시선과 총격전을 벌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81954.08.26독도의용수비대, 경상북도로부터 독도미역독점채취권 획득독도의용수비대가 미역채취권을 획득한 것은 울릉군수와 경찰서장, 어업조합장의 협의에 따라 1954년 봄부터 1956년 봄까지 3년 동안이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91954.08.28독도경비초소 및 표지 제막 기념식독도경비초소와 표지를 세운 것은 울릉경찰이었다(박춘환 전 경사 외).
101955.11.21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3척, 항공기1대 발포, 격퇴수비대원들은 1954년 12월 9명이 순경으로 발령 나면서 수비대는 사실상 해체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111956.04.08독도경비임무 전환(민간수비→국립경찰)
121956.12.30독도의용수비대, 경북지방경찰청 울릉경찰서 무기와 전투장비 일체 인계, 완전 철수
ⓒ 오마이뉴스 고정미

또한 이 책에서 홍 대장은 다이센마루호 선장과 선원들을 붙잡아 보급품을 압수한 뒤 "독도는 한국령"이라는 교육을 시켜 돌려보냈다고 썼다. 하지만 정작 수비대원들의 증언은 사실과 달랐다.

제1전대장 서기종(78세)씨는 "홍순칠 대장은 실습선이 왔을 때 독도에 없었다"고 전했다.

"독도의용수비대 1진 7명이 들어가고 난 뒤에 독도 실습선이 독도에 왔다고 들었다. 홍순칠 대장과 1명은 하루 만에 독도에서 나가고, 나머지 5명이 있는데 실습선이 와서 그냥 돌려보냈다고 했다."

서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실습선을 나포하거나 물품을 압수하거나 교육을 시켜 돌려보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홍 대장은 그 자리를 지키지도 않았다.

서씨와 함께 제2전대장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정원도(78세·경북 울릉군)씨도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나포했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안 맞는 말"이라며 "우리는 그걸 별다르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구라호 총격', 독도의용수비대가 한 일 아니다

1953년 7월에 일어난 '해구라호 발포 위협 사건'도 독도의용수비대의 전공이 아니었다. 당시 울릉경찰서 경비반장이었던 최헌식(85세·경북 울릉군) 경사는 "해구라호 선장을 내가 직접 만나 돌려보냈다"고 증언했다.

"1953년 7월 일본 정부가 영토표지목을 설치했다는 보고를 받고 수거하러 갔는데, 일본 순시선 해구라호가 접근했다. 나와 독도 생태계 조사를 나온 중학교 선생 2명이 해구라호에 올라가니 선장이 우리에게 독도에서 나가라고 해 실랑이가 벌어졌다. 얘기 끝에 양쪽 모두 물러가기로 하고 내려왔는데, 갑자기 우리쪽 선원이 소총을 몇 발 쏴 해구라호가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최 경사는 "그 때 발포하지 말도록 이야기했는데 선원 중 하나가 실수했다"며 "그 중 두 발이 해구라호 선창에 맞았는데 나중에 보니 일본 잡지에 크게 실렸더라"고 회고하며 당시 잡지기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1953년부터 약 2년여간 울릉경찰서 경비주임 등을 역임한 최헌식 경사. 그는 1953년 일본 순시선 해구라호에 올라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편 최초의 경찰관이다.
1953년부터 약 2년여간 울릉경찰서 경비주임 등을 역임한 최헌식 경사. 그는 1953년 일본 순시선 해구라호에 올라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편 최초의 경찰관이다. ⓒ 오마이뉴스 문경미
최 경사 증언에 의하면 '해구라호 발포 위협 사건'은 독도의용수비대와는 전혀 무관하게 벌어진 한·일간 마찰인 것이다. 최 경사와 함께 울릉경찰서에서 근무한 김산리(78세·경북 포항시)씨도 "최헌식씨가 해구라호에 올라가 선장과 담판을 지은 것이 독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한·일 조우"라며 "그 뒤로는 어떤 마찰이나 총격전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1954년에 연이어 발생한 것으로 돼 있는 일본 경비정·순시선과의 '총격전'도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1954년 9월경 일본 순시선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박격포탄 몇 발을 공포로 발사했다는 증언은 있었다.

서기종씨는 "1954년 9월경 일본 순시선이 접근하길래 흰 수건을 흔들며 접근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으나 계속 접근했다"며 "'저들이 상륙하면 죽겠구나' 싶어서 박격포탄 4~5발을 쐈는데 그 중 한 발이 순시선 뒤쪽 바다에 떨어지니까 배를 돌려 돌아가더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그 뒤로는 어떤 총격전이나 발포도 없었고 일본 순시선도 멀찌감치 독도를 돌아서 갈 뿐이었다”며 "당시에도 홍순칠 대장은 현장에 없었다"고 말했다.

독도의용수비대 제2전투대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이규현(82세·경북 울릉군)씨도 "일본 순시선과 총격전을 벌인 사실은 없다"고 증언했다.

결국 일본 경비정과의 전투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었던 셈이다. 1955년에 일어났다는 일본 순시선과의 총격전이나 대공전투 역시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생존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국민들에게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의 '빛나는 전과'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다른 방향으로 과장됐던 셈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목숨을 걸고 일본 순시선과 전투를 벌였다는 '영웅담'은 독도의용수비대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무기 훔치고, 사재 털어 초소 건립?

고 홍순칠 대장이 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인 '1억원'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고 초소를 지었다는 기록도 사실과 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홍 대장은 그의 수기 <이땅이 뉘땅인데>와 다큐멘터리 <독도수비대>를 통해 소총과 기관총을 부산항 미군 주둔지 '적기'라는 곳에서 훔쳐냈다고 적고 있다. 또 박격포는 당시 경북도경찰청 김종원 경찰국장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벌여 얻어낸 것으로 돼 있다.

홍연순(홍순칠 대장의 딸)씨는 "아버지가 당시 돈으로 1억원에 해당하는 사재를 털어 무기를 구입했던 것으로 안다"며 "그 때는 전쟁 중이었으니까 부산에서 돈만 주면 무기를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어머니(박영희, 독도의용수비대 후방지원대)도 군복을 사오면 재봉틀로 마무리하는 등 열성적으로 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부산에서 총기를 아무런 저항없이 샀다거나 훔쳤다는 이야기는 뭔가 석연찮은 대목이 있다. 오히려 전쟁중에는 무기의 반입, 반출이 철저히 통제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실제로 당시 울릉경찰서에 근무했던 경찰관들은 "모든 무기는 울릉경찰서가 대여해 준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산리(78세·경북 포항시)씨는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민간인들이 어디가서 소총과 기관총을 구하겠느냐"며 "박격포도 울릉경찰서 소유로 배정된 것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김정출(82세·경북 경주시)씨도 "무기를 개인이 샀다거나 훔쳤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전했다.

1954년 8월 28일 독도 경비초소 제막식 장면. 홍순칠(붉은원) 대장 등 민간인들과 함께 왼쪽 아래 경찰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여럿 보인다.
1954년 8월 28일 독도 경비초소 제막식 장면. 홍순칠(붉은원) 대장 등 민간인들과 함께 왼쪽 아래 경찰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여럿 보인다. ⓒ 자료사진
사재를 털어 동도에 경비초소를 지었다는 홍 대장의 기록에 대해서도 생존 경찰관들은 반박하고 있다.

홍연순씨는 "수비도 하지 않았던 경찰이 어떻게 초소를 지어주느냐"며 "아버지(홍순칠)가 돈을 들여 초소를 지었다"고 말했다.

반면 1954년경 울릉경찰서 경사였던 박춘환(85세·경북 포항시)씨는 "내가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목재를 가지고 가서 초소를 지으려다 태풍을 만나 모두 쓸려보낸 경험이 있다"며 "그 뒤에 다시 재료를 가져가 공사를 시작했고 1954년 8월 28일 완성했다"고 증언했다.

박씨의 말대로 1954년 초소 완공 뒤 찍은 기념사진에는 경찰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다. 홍순칠 대장의 수기처럼 민간인들이 사재를 털어 지었다면 굳이 경찰과 함께 사진을 찍을 이유는 없다. 따라서 울릉경찰서가 정부 예산을 들여 초소를 건립했다는 박씨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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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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