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가야금(대표 송혜진)의 변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국악에는 애써 외면하던 언론도 숙명에는 의외의 시선을 쏟는다. 지난 9월 싸이월드 웹진 <스테이지>에 소개된 숙명 리뷰는 최고의 히트수와 엄청남 댓글을 남겨 화제가 되었다. 아니 훨씬 전부터 숙명가야금연주단(아래 숙가연)은 누리꾼들 사이에 ‘숙가연’이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회자되었다.
국악계가 아닌 일반 대중 그것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아이콘이 된 원인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폭발적인 동기를 제공한 것은 한 아파트 광고영상이었다. 숙가연이 연주하는 캐논 변주곡과 힙합 그리고 비보이의 결합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잘 들어맞았다. 물론 국악과 힙합의 크로스오버가 숙가연이 처음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숙가연만이 떴다.
숙가연이 남들과 달리 대중들에게 인정받게 된 가장 큰 힘은 일회성 이벤트로의 시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라는 점이다. 1999년 최초의 가야금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달고 창단되었다가 최근 이름은 숙명가야금연주단으로 바꾸었다. 숙가연이 창단 이후 지금까지 줄곧 지향한 것은 '대중'이었다.
처음에는 국악계의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깨를 들어내는 것은 물론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는 그녀들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누리꾼들은 열광했지만 아리따운 그녀들이 연주하는 < Let it be > 등의 비틀즈 연곡이며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 등의 남미음악에 대한 폄하가 숙가연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숙가연은 국악계 아니 기초예술계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할 대기록도 남기게 됐다. 숙가연 음반 < For You >가 인터파크 음반판매 주간 집계에서 1위를 차지한 기록을 갖게 된 것이다. 제작사인 서울음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그 동안 숙가연을 괴롭히던 일부의 평가절하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숙가연이 10월 1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 당당히 섰다. 숙가연은 원래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에 모태를 두고 있고, 매해 가을마다 정기연주회를 가져왔다. 그러나 올해 정기연주회는 어느 때보다 기대와 불안이 컸다. 음반판매나 누리꾼의 관심은 높은데, 정작 무대로 그 열기가 연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인기를 자부할 수 없는 공연예술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말의 우려는 리허설이 진행되는 사이에 말끔히 해소되었다. 공연을 2시간이나 앞둔 때부터 이미 매표소에는 관객들의 행렬이 이어졌기 때문이고, 800석 규모의 예악당은 그들을 모두 받아드리기에는 너무 좁았다.
좌석을 확보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입석으로 입장해 계단통로까지 진을 쳤다. 그리고 그런 관객들의 열의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숙가연의 연주는 객석에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연주 마지막에 선보인 화제의 < All for one >에 합세한 힙합과 비보이로 인해 국악원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열광이 객석에 가득했다.
이번 숙가연의 정기연주는 언제나 그랬듯이 산조(김죽파류)합주, 가야금병창(수궁가 중) 합주, 창작곡(다랑쉬, 한오백년) 연주 등으로 1부를 꾸몄다. 정기연주회는 대학원 교육과정에 대한 발표 성격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숙가연이 크로스오버를 하더라도 근저에 전통음악에 대한 기본을 분명히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2부는 숙명가야금과 숙명여대 대학원생 모두가 참여하는 숙명가야금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창기부터 호흡을 함께 한 이용탁(국립창극단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오케스트라의 명색에 걸맞게 바흐의 <바디네리(Badinerrie)>와 <코랄(Choral)> 두 곡과 페루 음악 <엘 콘도르 파사>를 연주했다.
3부에서야 비로서 진정한 숙가연이 등장했다. 숙가연은 숙대여대 대학원 졸업생들로만 구성한다. 그만큼 숙련도나 세련미를 갖춘 연주임에 분명했다.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를 몰고 다닌 비틀즈 연곡으로 문을 열고는 해금 디바 강은일과 러시아 민요 <백학>과 신형정 작곡의 흥겨운 곡 <서커스>를 연주했다.
그리고 마지막 곡으로 비보이들이 무대로 등장하면서 숙가연이 선 무대는 근엄한 국악원이 아니라 스탠딩 콘서트가 열리는 대중가수의 그곳으로 순식간에 변신하였다. 앙코르로 이어진 크로스오버 가야금과 비보이들의 국악원 습격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2시간이면 연주회로서는 긴 시간이지만, 숙가연의 2시간은 오히려 짧은 듯한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연주를 마친 예악당 로비는 간만에 북새통을 이뤘다. 연주자들에게 사인이나 혹은 기념촬영을 원하는 팬들이었다. 눈물 날 정도로 뿌듯한 현상이다. 물론 국악계에도 스타급 솔리스트들이 없지는 않지만, 단체에 이런 호응은 정말 뜻밖의 일이 분명하다.
국악원을 처음 찾았다는 한 여성관객은 “숙가연이 연주한 비틀즈, < all for one > 등만 들었는데, 전통가야금곡들도 들어보니 참 좋았다”면서 “다음부터는 전통국악연주도 와볼 계획이다”고 하였다. 비록 전통음악과는 다른 크로스오버의 얼굴로 대중에게 다가서지만 숙가연의 존재는 전통음악으로 유인하는 촉매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숙가연의 성공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숙가연을 만들고 조련하다가 현재는 중앙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가야금 명인 김일륜 교수와 현재 숙가연 대표인 송혜진 교수는 이 모든 변화의 핵이다.
그리고 숙가연의 음악을 만드는 세공사로서 지휘자 이용탁, 작곡가 박일훈(전 국악원 연구실장)이 음악의 내면을 갖추도록 하고, 해금 디바 강은일, 가야금 병창 이영신 그리고 가야금 고지현이 연주의 외연을 다듬고 있다.
특히 고지연은 이날 연주에서 본래 이건영(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가야금 협주곡 <한오백년>을 가야금 중주곡으로 재해석해 좋은 평을 받았다. 좋은 작곡가의 기존곡에, 악기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연주자적인 해석을 가미하는 새롭고도 바람직한 시도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는 그 동안 국악계에 생산된 관현악곡들에 대한 새로운 활용의 예를 제시한 의미도 갖는다.
숙가연은 이번 정기공연의 주제로 < TRINO >란 단어를 내걸었다. 이것은 트렌드(TREND)와 혁신(INNOVATION)의 합성어로 숙가연이 걸어온 발자취를 적절히 은유하고 있다. '트리노'를 좀 더 의역하자면, 가야금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숙명의 변화는 가야금의 진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숙가연에게는 대단히 결례될 수도 있겠으나, 숙명여대 대학원 가야금 전공자들은 학부시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이야기일 뿐이고, 현재 그들은 숙가연을 통해 또래 누구보다도 각광을 받고 있다.
숙명의 변화는 엘리트 중심의 국악계에 이노베이션을 넘어 레볼루션을 상징할 듯 하다. 숙가연의 성공은 그들과 또한 현재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신인들에게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