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에 앞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별세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이전에 한국 정부의 고위 외교관으로서 한국 외교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최 전 대통령은 훌륭한 외교관 이미지보다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 중 가장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에 관한 여론조사를 해보면 최 전 대통령은 항상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1979~1980년)은 한국 사회가 10·26 사태를 계기로 지긋지긋한 박정희 군사 독재 체제를 끝장내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로 나갈 수 있었던 한국 정치사에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최 전 대통령은 군사 파시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준비를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책무를 띠고 있었다.
결국 그가 재임 시절 어떠한 역사적 원칙과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느냐에 따라 한국 사회의 역사적 행로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적 열망을 저버리고 박정희 군사 파시즘을 계승한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 군인 세력(하나회)에 의해 자행된 12·12, 5·17 군사 쿠테타에 굴종하고 타협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20년간의 박정희 군사 독재 체제에서 이를 계승한(심화·발전시킨) 전두환, 노태우 군사 파시즘 체제가 약 15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20년간의 군사 독재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가야 할 중차대한 역사적 시점에서 군사 파시즘이 연장된 것은 결정적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역사적·정치적 무능력과 무책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5·17 군사 쿠테타에 분노하여 일어난 광주 민주 항쟁을 쿠테타 세력이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비극적인 결과를 빚어낸 것에 대해서도 최 전 대통령의 책임은 막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퇴임 이후에도 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을 한 적이 없다. 도리어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 침묵을 지킴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커녕 은폐와 회피로 일관하였다.
결국 그는 대통령직 재임 시절과 퇴임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장애 요소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이런 인물에 대해 오늘 국무회의에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의결한 것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더욱이 이 정권이 한국 정치사에서 독재와 파시즘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일구어 낸 무수히 많은 국민들의 고귀한 희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기에 이러한 결정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최 전 대통령의 별세를 통해 일국의 정치 지도자가 중대한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사후에도 철저하게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을 경우, 이에 따른 준엄하고 엄혹한 역사적 비판과 질책이 따라야 한다는 교훈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이용길 기자는 고려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증권 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대학과 언론 매체에서 강의와 시사 평론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21미래전략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도 마라>(도서출판 T&F, 2005), <어느 진보주의자의 세상 비틀기>(동성출판사, 2002)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yongkillee.do)
* 이 글은 <대자보>에도 송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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