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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돈을 절약해 책을 사서 돌려 보던 시절이 그립다.
ⓒ 이명옥

교사로 책 욕심이 대단하셨던 아버지 덕에 삼면이 책으로 빼곡이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전공이 한국사였던 아버지는 대부분 당신의 취향과 필요에 맞는 책을 구입하셨다.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들 수 있는 귀한 환경을 만들어 주셨던 셈이다.

그러나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나의 초등학교 때는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세계명작 동화 50권이나 100권 짜리 전집물이 책장 가득하고 <소년중앙>, <소년동아> 같은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친구들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었다.

새로 잡지가 나올 때쯤이면 친구에게 놀러갈 날짜와 책을 빌릴 순서를 미리 예약해야 했으니 말이다.

<정글북>, < 파브르 곤충기>, <작은 아씨들>, <폭풍의 언덕>, <빨간 머리 앤>, <홍당무>, <제인 에어>, <소공자>, <소공녀>, <키다리 아저씨>, <80일간의 세계 일주>, <사랑의 학교>,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책들을 통해 동심을 키우며 책에 재미를 붙여 책 읽는 습관이 들었던 것 같다.

가정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풍성한 문화적 환경을 접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대단한 행운인 것 같다.

나의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사랑굿>의 시인이며 <태백산맥>, <아리랑>의 저자인 조정래 님의 부인인 김초혜 님이다. 당시는 김초혜 선생님만 시인으로 등단해 계셨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중학생 무렵 삼중당, 삼성 문화문고, 범우사 등에서 문고판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문학 전집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 덕에 교과서에 제목만 실린 단편들을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늘봄 전영택의 <화수분>, 김동리의 <을화>, <무녀도>,< 광화사>, 나도향의 <물레방아>와 같은 단편의 내용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학창시절의 독서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다.

고등학교 쓰기 선생님도 동시 작가였고, 음악 선생님은 바리톤 윤치호 님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책과 음악 같은 문화 생활 속에 젖어들 수 있었다.

특히 <대지>의 저자 펄벅 여사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을 방문해 내가 다녔던 이화여고에서 연설을 했다. 두 책은 필독서였는데 <25시>가 절판되어 서로 빌려보던 기억이 새롭다.

덕분에 나중에 영화로 보던 <대지>나 <머나먼 쏭바강>의 작가 박영한의<왕룽 일가>가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왔던지….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와 달리 외국 문학에 심취해 외국 문학 작품들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나는 특별히 서머셋 모옴의 작품들을 좋아해 그의 단편 <비>, <달과 6펜스>, <면도날>, 그의 장편 <인간의 굴레 >, <썸머 힐> 등을 열심히 읽었다.

당시 교실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김형석 교수의 <고독이라는 병>이나 안병욱 교수의 에세이들을 돌려가며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

공부하기 싫은 교과서 사이에 끼워 넣고 읽었지만 대범한 친구들은 버젓이 내놓고 다른 책을 읽어도 그리 제재를 받았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선생님들도 아시면서 묵인했던 것 같다.

헷세의 <데미안>이나 <차륜 밑에서>, <지와 사랑>, 테니슨의 <이녹 아든>,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교실에서 돌려가며 읽던 책들이다.

그러나 좀더 시니컬한 인생관을 지닌 친구들은 까뮈의 <이방인>, <전락>,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구토>, 시몬느 드 보봐르의 <제 2의 성>, 키에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책에 빠져들기도 했으니 조숙했던 것일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유년시대>, <안나 까레리나>, 또스또옙스키의 <가난한 연인들>, <죄와 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우나무노의 <안개> 등도 고등학교 시절 접한 책이고 보면 당시는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었나 보다.

독서 환경이 나의 학창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지고 가장 활발하게 독서를 해야 할 학창 시절에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이고, 집은 잠자는 곳이 되어버린 아들아이를 보며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적 사고의 증발은 잘못된 교육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어서 학창 시절 열중했던 독서에 대한 추억 하나 없을 아들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 가을, 아들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이라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대지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문예출판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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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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