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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란 책을 읽고 그가 쓴 소설책을 다 읽어보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작년에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를 읽은 후론, 그 결심이 무색하게 이제야 그의 두 번째 소설을 읽게 되었다.

마루야마 겐지 소설의 특징이랄까, 두 편의 소설로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술술 읽히지가 않는다. 요즘 갑자기 불거진 번역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주인공의 마음 상태나 혹은 현상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 때문인 것 같다. 잘 읽히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신경 써서 읽고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일본 어느 대도시 가까이 조금은 울창한 숲이 있다. 물론 예전엔 그 푸르름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온갖 생명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숲은 가까운 도시에서 배출하는 불필요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질에 중독 되고 점차 곤충의 세계는 빈약해 진다. 그리고 팽창하고 있는 도시에 밀려 점점 그 크기가 줄어든다.

이 숲엔 그 종류를 알 수 없는 큰 나무가 있는데 처음 씨앗에서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고, 천년이 흐르고서야 처음으로 꽃 한 송이를 피운다. 그리고 이 숲으로 젊은 여자가 홀로 들어와 나무에 목을 매 숨을 거둔다.

아이를 배고 있었던 여자는 삶을 끝냄과 동시에 아이를 낳게 된다. 아이를 낳았다기 보다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니 아이가 스스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죽은 엄마와 탯줄로 연결되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는 자신을 버린 엄마로 인해 어쩌면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이 나무는 생각한다.

젊은 여자의 죽음과 갓 태어난 아이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이 나무는 천년 동안 자신의 나이테 곳곳에 새겨 넣었을 지혜를 아이의 삶에 투영한다. 나무는 아이의 30년 인생을 마치 유리 구슬을 통해 먼 미래를 점치는 것처럼 단 하루만에 보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미래를 보여주는 그 영상들은 단 하루에 일어난 일도 아이의 30년 세월도 아닐 것이다. 그건 천년 세월이 모인 집합체라고 해야할까. 천년 동안의 간절함으로 이 나무는 아이가 언제나 흐르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너는 언제나 잘 태어났다고 어깨를 토닥이면서.

나는 이 숲에 속하는 한 그루 나무다. 이 숲의 보호를 받았기에 이만큼 성장하였고 여지껏 살아남았다.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홀로 자란 나무처럼 생색을 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나 숲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내가 있기에 숲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나와 숲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나는 지금껏 개개의 나무나 풀이나 동물과의 연관밖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설이란 게 어차피 작가의 주관적인 이야기다. 작가의 입을 빌린 이 나무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내용이 아이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만큼 이 이야기는 일본의 먼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사건들이 먼 미래에 얼마나 큰 폭풍으로 변할지를 예상하며 작가는 그 모든 일들을 경계하고 있다.

너는 자신을 법률보다 위대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러나 법률이 위대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너는 자신을 국가보다 위대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러나 국가가 위대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유치한 문학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학을 위한 미학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포악의 극치를 다하고 있는 반동적인 권력 앞에서도 그들이 매달린 외형만의 평등 사상은 보다 깊이 구체화되는 일이 없지 않았던가. 그들은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할 수 있는 시대에는 말하고, 소란을 피울 수 있는 시대에만 소란을 피우지 않았던가. 그들은 틀림없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활동 전선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일단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지."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을 잘 수 있는 자유, 정치적인 문제에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읽고 싶은 책을 볼 수 있는 자유 , 우리는 자유라는 큰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많은 관습의 굴레에 걸려 혹은 스스로의 굴레에 걸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포기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항상 흐르라고 말한다. 절대로 한 곳에 머물려 있지 말고 항상 흐르라고 한다. 몸까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정신만이라도 흐르라고 한다.

한 곳에 머물게 되다 보면 안정감이 찾아들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안정감이 주는 달콤함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달콤함을 맛보다보면 결국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사상에 빠지게 되면 점점 그 사상에만 묻혀버리게 되고 역시나 그 사상만이 진실인양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마루야마 겐지 소설을 흐르는 주제는 성선설과 자유가 아닐까, 하고 이 책을 덮으면서 생각해 본다. 아니, 작가의 소망은 성선설과 자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천 년 동안에 1 - 개정판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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