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토요일 저녁 시드니는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들떠 있었다. 같은 시각 '언어 익스체인지'라는 다소 생소한 행사가 열려 찾아가 보았다. 시드니 한복판의 한국 식당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 젊은이들과 한국어를 이제 막 배우고 있는 외국 젊은이 40여명이 10월 28일 저녁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시드니에 위치한 을티모 테잎(Ultimo Tafe)에서 주최하고 한인커뮤니티 사이트 '호주114'에서 후원하는 언어교환 모임(Language Exchange) 현장이다.
모임이 시작되는 6시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현수막이나 안내 포스터 한 장 없는 조출한 자리였지만 그 어느 만남보다 떠들썩했고 젊은 기운이 풋풋하게 묻어났다. 국적이 다르고 모국어가 다른 그들이지만 서먹서먹해하는 것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주최 측은 의도적으로 한국인과 외국인을 섞어 앉게 했다. 참석자들은 떠듬떠듬 한국말로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떠듬떠듬하기는 한국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외국 젊은이들이 아직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천천히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영어로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만국공용어인 바디랭귀지를 보태기도 했다. 아직 상대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낮아 손짓발짓을 해가며 웃고 떠드는 자리는 마치 초등학교 동창회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들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등 동남아 출신들 뿐 아니라 유럽 출신까지 섞여있어 그야말로 다민족국가인 호주의 축소판이었다. 한국어를 매개로 한 이번 만남은 호주에서의 한류 열풍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호주 내 한인 숫자는 2005년 이미 8만을 넘어섰고, 시드니 중심가에 그럴듯한 한인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여기에 워킹홀리데이메이커 약 2만 명을 더한다며 10만 이상의 한국인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한류, 혹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만한 움직임은 전무한 형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호주 젊은이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하고, 언어 교환을 통해 스스로 한국어를 익히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회성 행사, 전시용 이벤트가 아닌 진정한 문화교류라고 할 수 있다. 한류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공간을 뛰어넘어 뒤섞이는 글로벌시대에 나타나는 문화 현상이다. 이번 자리는 다민족국가인 호주에서 열렸다는 측면에서 더욱 인상 깊은 행사였다.
문화라는 것은 사회적 전통, 민족성, 경제수준 등 수많은 요소들이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특정 인물에 집중해서 나타나는 한류는 다른 문화적 현상에 비해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한 명의 배우나 가수에 열광하는 한류란 사실 특정 기획사에 의해 연출된 측면이 강하고, 그것이 한 인물의 캐릭터에 집중해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문화현상이라서 진정한 한류라고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론매체들이 요란하게 한류를 이야기하지만 기획사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를 버젓이 베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경우 문화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마케팅 측면에서 '한류'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한류' 안티세력이 집결하기도 한다. 소위 '혐한류'가 그것이다. 한류스타의 무대 뒤편에서 주판알을 두드리는 기획사를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언어는 나라, 민족 등 하나의 사회 집단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퇴적층이다. 언어야말로 한 나라의 문화가 모두 녹아있는 것이다. 어느 한국 가수의 노래를 외우고 있는 것이 한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가수의 공연에 열광하는 청중에게서 느끼는 한류보다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서 진정한 한류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이날 모임에 외국인 자격으로 참석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호주 국적을 가지고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호주이민 2세대가 많았으며, 한국인 참가자들은 대부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와서 일을 하며 영어연수를 하고 있는 진취적인 20대 젊은이들이었다.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어가 필요했고, 한국인들에게는 영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을티모 테잎(Ultimo Tafe)에서 한국어 강좌를 가르치고 있는 백진 교수는 이번 행사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언어라는 것은 문화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게 문장만 외우고 문법만 가르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우리 학생들과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한국 학생들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언어 수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매우 젊고 활동적이기 때문에 쉽게 친해지고 쉽게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인이, 한국 문화가, 더 나아가 한국어가 호주 사회와 호주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 "한국 노래 참 좋아요" | | | [인터뷰] 한국어 수강생 루시양 | | | |
| | ▲ 을티모 테잎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루시 | ⓒ이현상 | 을티모 테잎의 한국어 강좌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한다는 루시양을 소개받아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출중한 외모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표정과 전달되는 말의 느낌에서도 '한국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루시입니다. 호주 사람입니다. 대학생이고요. 을티모 테잎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하고 있나요?
"간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문화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노래와 영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동방신기와 보아의 팬이기도 합니다. 내년 1월에는 한국 방문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부를 줄 아는 한국 노래도 있나요?
"그럼요. 한국 가수 보아의 노래는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한번 들어볼 수 있냐는 부탁에 루시양은 망설임 없이 한국 가수 보아의 노래를 완벽하게 불렀다. 루시양의 발음은 완벽한 한국어였다. 음치인 기자는 약간은 뜨악했다.
-발음이 정확하네요. 오늘 이 자리는 어땠나요?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한국어는?
"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맙습니다."
분명한 자기 의사 표현은 같은 또래의 한국인이나 호주인이나 다르지 않았다. 루시양은 기자가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 아마도 한국의 가장 큰 인터넷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실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 이현상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