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임영신씨가 평화운동의 행보를 담은 수필집 <평화는 나의 여행>(2006, 소나무)을 펴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엄마에게서 안 떨어지려는 두 아이를 한국에 두고 위기일발의 이라크로 달려가 활동했던 극적인 이야기를 1부 ‘이라크’에 실었고, 2부 ‘피스보트’에는 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평화단체 피스보트와 함께 분쟁지역을 항해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담았다. 3부 ‘평화여행’은 대안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를 찾아 레바논, 독일, 스위스, 필리핀 등지를 다녔던 여정이 그려졌다.
임영신씨는 3년여 동안 ‘평화’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온 지구를 헤집고 다닌 셈인데, 그가 정의 내리는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학살의 상처로 얼룩진 필리핀 만다나오 섬에서 만난 어느 활동가의 말을 떠올린다. 오랫동안 현장을 지켰던 그 활동가는 말한다. 전쟁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평화로운 관계를 많이 맺어 가는 것뿐이라고.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가장 소중한 성과는 ‘관계’인 것 같아요
그 ‘관계’에 공명한 탓인지,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다. 그가 다닌 곳은 참혹한 사건으로 분노와 공포와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은 분쟁지역이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그곳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에 주목한다. 그는 그 만남 속에서 울고 웃는다. 사건을 통해 평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평화를 배운다.
그 같은 여행 방식은 신문 1면을 장식해온 긴박한 사건들을 해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그 긴박한 사건 속에서 만난 사람들 개개인의 삶에 시선을 쏟게 한다. 그리하여 포화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처지와 심정에 공감하고, 그 뒤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피력하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는 3년여 간 세계를 떠돌며 ‘평화’가 무엇인지 찾아 다녔던 것이 아니라, 시체만이라도 돌려 달라며 아부그레이브 감옥 앞에서 울부짖는 이라크 어머니와, 이스라엘의 폭격 앞에 가슴 졸이며 평화로웠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레바논 난민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평화를 갈구하는 민다나오 섬사람들을 ‘가슴’으로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이라크인 수아드와 함께 한국에 돌아와 ‘평화의 증언’을 주제로 전국 강연여행을 다녔다. 그 성과를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장 소중한 성과는 ‘관계’인 것 같아요. 이슈는 지나가고 관심은 잊혀지죠. 하지만 관계는 계속 되잖아요. 뉴스 속의 이슈가 지나가고, 모두의 기억에서 이라크가 사라져도, 죽은 날까지 서로를 심장으로 기억할, 그래서 사랑할, 관심에서 관계로 치환된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성과입니다.” (책 본문 108쪽)
그가 전쟁이 임박한 이라크에 간신히 입국하여 찾아간 곳은 남부 도시 바스라의 어린이 병원이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사용했던 열화우라늄탄의 영향으로 많은 아이들이 기형아로 태어났고, 그 후 미국의 경제제재는 그나마 정상으로 태어난 아이들마저 영양실조로 만들었다.
걸프전 이후 12년 동안 매달 5천명의 이라크 아기들이 죽었다는 유니세프의 보고서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낡은 침상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어린이들은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 아기들에 대한 관심이 관계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평화롭다’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평화여행을 떠나고 싶으세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가 ‘평화’다. 그는 평화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였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가 평화를 빌미 삼아 무력을 행사하고 인명을 살상할 적마다, 나는 팀 버튼 감독의 영화 <화성침공>이 떠오른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화성인들은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라고 안내방송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대지만, 눈앞에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모순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화성인과 지구인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다. 부시와 이라크 아기의 관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복자과 피정복자 사이에 어찌 ‘심장으로 기억하고 사랑할’ 관계가 형성되겠는가.
북한의 핵실험으로 온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되었다. 평화 위기는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평화에 대한 주의 주장과 방법론이 쏟아져 나오지만, ‘관계’를 중심으로 삼은 ‘평화론’은 그다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수천 년간 인류는 전쟁으로 이웃 나라를 복속 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의 역사에는 늘 참혹한 갈등의 도돌이표가 붙어있었다. 이제는 평화로운 관계가 평화를 준다는 믿음을 가져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저자처럼 평화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안내서 역할도 한다. 피스보트 항해 참가 방법을 비롯하여 국내외 평화단체 소개와 각종 프로그램이 부록으로 상세하게 실려 있어 발걸음을 떼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2006년, 소나무 출판사,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