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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박사님의 <해방자 예수> 표지
안병무 박사님의 <해방자 예수> 표지 ⓒ 현대사상사
앞의 글에서 썼듯이 1975년과 1976년은 내게 방황의 해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생각해왔던 목회자에 대한 좌절과 종교를 버린 상태에서의 번민, 독재정권 아래의 암울한 사회, 그리고 일반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활.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무지개를 좇아 달려왔는데 갑자기 캄캄한 밤이 된 것과 같은 혼돈이었다.

그중에서도 종교에 대한 고민은 상당히 깊었던 것 같다. 이미 함석헌을 통해 무교회주의가 어느 정도 스며들어서 정권에 빌붙은 교단을 하나님과 구분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5년 동안 교회를 통해 주입되어온 신앙과, 사회와 부딪히면서 느끼는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스물의 내게는 중요한 문제였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1976년 10월이나 11월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집이 있는 의정부로 가기 위해서는 종로5가 기독교 방송국 건너편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길 건너편 기독교 방송국 1층의 서점을 보게 됐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였을까, 나는 길을 건너 서점으로 들어가 참으로 오랜만에 '과거의 책'들을 훑었다.

책꽂이 아래편에 웬 얇은 잡지 과월호들이 눈에 띄었다. 크기나 모양은 <씨알의 소리> 비슷한데 두께가 조금 얇았고 표지에는 한자로 <現存(현존)>이라고 써 있었다. 한 권을 꺼내서 읽어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여지껏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고민해왔던 것이었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몇 권을 정신없이 훑었다. 서점 주인이 다가와 보더니 한마디 했다. "판금 된거라 그게 다예요." 젠장, 판금이라니, 종교서적도 판금시키나? 나는 호수가 다른 것들을 모두 골라서 계산대에 올려놨다. 한 권에 100원이었는지 120원이었는지,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날, 호주머니를 다 털어도 돈이 모자라자, 나는 주인으로부터 며칠간 팔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책방을 나섰다. 거리는 어두웠지만 나를 2년간이나 가둬뒀던 어둠은 벌써 사라지고 있었다.

<現存> 최근호에 신학강좌 안내문이 있었다. 1977년 초, 그러니까 동국대 2학년 초엽, 안병무 박사님이 운영하시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박사님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이런 인연에서였다. 거기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막 나오신 박사님의 신학사색("해방신학을 넘어서 민중신학으로")을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평생의 영광이었다. 1970~80년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민중신학이 태동하는 자리에 내가 그 분과 함께 있었다니.

하지만 그 때는 안병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그저 나의 생각을 옳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탈춤이며 판소리를 언급하는 강의가 어떻게 신학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의문이었고, 신학의 안테나라 불리는 서남동 교수의 강의는 아직도 보수적인 신앙의 틀에 갇혀 있던 내게 충격일 뿐이었다.

강의 사이 쉬는 시간에 배운 노래 <흔들리지 않게>나 <가라 모세>는, 혹시 내가 불순한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운동권도 아닌 스물 초입의 청년이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시절 은밀한 강좌를 들으면서 당황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보는 희열이 있었다.

그 후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오는 계간지 <신학사상>의 구독자가 되었고, <해방자 예수>나 <성서적 실존> 같은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병무 박사님의 사상과 학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문과 삶을 일치시킨 한 사람의 스승을 갖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내게 빛을 던져 주셨던 고 안병무 박사님과, 당시 한국신학연구소에 근무하셨던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혼란기를 겪으면서 <현존>은 제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영인본밖에 없더군요. 표지사진을 못 올리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해방자 예수 - 현대사상총서 1

안병무, 현대사상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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