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회 사건'은 과연 간첩단 사건이 맞나. 김승규 국정원장은 "고정 간첩이 연루된 사건이다. 간첩단 사건으로 본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다. 국정원의 수사를 통해서도 간첩혐의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직 없고, 검찰도 간첩단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측 인사를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접촉하면 실정법 위반이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간첩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보안법상의 회합·통신 조항을 위반한 것과 목적수행 조항을 위반한 것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간첩이라 함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여 전달하는 행위를 한 자로, 이같은 행위를 했을 때 간첩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간첩단 수사라면서 공개수사하는 이유는?
그런데 지금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장민호씨를 제외한 네 사람은 일심회 가입이라든가, 북측 인사 접촉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하려면, 구속자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가기밀 탐지·수집활동을 해서 북에 전달한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국정원의 수사가 진행 중이니, 일단 그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자.
따라서 일심회 사건이 간첩단 사건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수사결과가 더 나온 이후에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제까지 수사과정에서 국정원이 보여준 문제점들은 분명히 짚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의아한 것은 '간첩단 사건' 수사가 사실상의 공개수사로 진행되고 있는 전례없는 상황이다. 통상적으로 간첩단 사건 수사는 보안을 유지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기소단계에 가서나 수사결과가 발표되곤 했다. 그래야 수사기밀을 유지한 상태에서 '일망타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 수사상황은 수시로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초유의 일이 빚어지고 있다. 구속영장 청구 단계에서부터 피의자들의 혐의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구속된 5인 이외에는 '간첩단'에 속한 사람이 더 없다고 국정원이 확신을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또 다른 '간첩'이 있다면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하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내용들은 정황적인 수준의 것들일 뿐,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내용의 것들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식의 정황들은 계속 제시되었지만, 정작 구체적으로 어떠한 간첩행위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윤광웅 국방부장관 해임결의안 무산 경위 파악',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노당이라도 열린우리당에 표를 몰아줘 한나라당 당선을 막는 방안', '환경문제를 끌어들여 시민단체를 반미투쟁에 끌어들이는 방안' 등에 대한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정도의 내용들이 고정간첩들이 목숨을 걸고 탐지하고 수집하는 국가기밀사항들인지, 현실적으로 구속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인지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론을 통해서는 수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쉬지않고 흘러나왔다.
국정원이 이번 사건 수사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않은 상태에서,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수사내용 흘리기가 계속되었다. 왜 이처럼 간첩단 수사의 기본을 무시하면서까지 전에 없는 언론유출을 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국정원은 뒤늦게야 함구령을 내렸다. 언론의 신중한 보도를 당부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국정원의 수사상황은 매일같이 조간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대부분이 국정원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과 '가능성' 수준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달 31일자 <중앙일보>의 보도내용이 눈길을 끈다. <중앙일보>는 국정원 관계자의 말을 빌어, 이번 영장청구가 "김 원장이 신념에 따라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린 것"이라며, "주변에선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안보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이 사건을 터트리고 언론을 통해 수사를 공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일까.
<중앙일보>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면 심각히 우려되는 일이다. 간첩수사는 신념에 따라 혹은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과 증거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이라는 개인적 가치나 '경각심'이라는 목적이 앞섰을 때, 수사는 그에 맞추기 위해 무리를 하게 될 위험이 상존한다. 과거 공안사건들의 사례에서 우리는 이같은 경우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국정원은 이 사건을 모호한 방식으로 언론에 공개하기 이전에, 간첩혐의 부분에 대한 확인을 먼저 했어야 했다. 연루자들을 오래 전부터 추적해왔다면서 어째서 아직까지 간첩행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는지도 의문이다. 일단 떠트리고 보자는 식의 대처가 일심회 사건 수사에 대한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촉발시킨 것이다.
국정원장의 신념에 따라 수사해서는 안돼
지금 일심회 사건 수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실체에 대한 관심보다 외압설, 국정원 내부갈등설, 김승규 원장 인터뷰 파문 등 수사 외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커져버린 상태이다. '간첩단 사건' 수사라는 본령에서 벗어나 정치적 논란거리로 변질되어버린 모습이다.
이같은 상황은 국정원이 수사를 제대로 하는 데에도 여러 어려움을 던져줄 뿐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상당 부분 국정원의 책임이 있었음을 국정원은 돌아보아야 한다. 김승규 원장의 부적절한 인터뷰가 그에 불을 질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체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밝히고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일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상황. 이것이 과연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어넣는 방법인지 묻게 된다.
국정원이 설익은 사건을 조급하게 터트린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짚은 것인지는 앞으로의 수사결과와 사법적 판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일심회의 실체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도 가려지게 될 것이다. 다만 이번 수사과정에서 보여준 국정원의 모습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국정원은 오직 사실과 증거를 갖고 이번 수사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국정원장 개인의 '신념'이 수사방향을 좌우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이번 사건이 또 다시 과거사조사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