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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명일씨. 비엔나에서 그녀는 성공한 한국여성중 한 명이다.
ⓒ 배을선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가브리엘 샤넬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패션은 바뀌고 사라지고 다시 찾아오지만, 한 사람의 성격과 인격, 퍼스낼리티와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주는 스타일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스타일은 가정, 교육, 사회, 환경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독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유행과 명품이 패션을 좌우하는 작금의 시대에 진정한 스타일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일까.

패션잡지는 더 이상 스타일의 선도자가 아니라 소위 명품 판매를 부추기는 광고지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세계의 '패션빅팀'(Fashion Victim: 패션의 희생자)들은 커다란 로고가 각인된 핸드백을 들고 스타일을 보여주기보다는 '얼마 짜리'라는 가격을 보여주는 데에 더 열성적이다. 스타일과 패션의 왜곡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앤드리아(앤 헤더웨이)가 샤넬 수트와 샤넬 액세서리를 몸에 걸치기 전까지 그녀의 상사인 잡지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게 꼭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추락하고 있는 패션에 진정한 날개를 입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송명일(46).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국립 응용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비엔나 1구에서 소위 '옷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가게는 '패션연구소'로 불리고 있다.

그녀 또한 패션의 구루(Guru, 선구자)로 대접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인이 패션아티스트로 유명해지기 힘든 척박한 유럽시장에서 그녀는 개성있는 패션아티스트이자 머천다이저, 스타일리스트 등으로 불린다.

물론 우리에게 그녀는 성공한 한국여성이다. 가을날씨 답지 않게 따뜻했던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침, 그녀를 만났다.

▲ 비엔나 2구로 이전한 매장 '송'.
ⓒ 배을선

"그녀는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하고 비엔나에 왔다"

- 숍의 간판은 '송(Song)'이지만 인터넷에는 '사바 송'으로 되어있다. 불교신자인가? 인간의 세계인 속세를 지칭하는 '사바'를 왜 회사이름으로 내걸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웃음) 불교신자가 아니다. 사바(Saba)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인 남편의 성이다."

- 몰랐다. 그럼 철학적인 질문은 더 이상 할 수 없겠다. 어떻게 오스트리아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한양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당시 오스트리아 영사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항상 오스트리아 이야기를 듣고 친근해졌다. 또 대학교 재학 당시 유럽여행을 왔었는데, 독일·프랑스 등은 둘러봤지만 오스트리아는 와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와보고 싶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낭만적인 불어보다는 딱딱한 독일어가 듣기에 더 좋았다. 오스트리아의 국어도 독일어가 아닌가. 그래서 독일 뮌헨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입학원서를 냈다. 마침 뮌헨에서는 응용미술대학이 없어서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 응용미술대학으로 결정했다."

- 오스트리아 미디어들이 당신을 인터뷰할 때 매번 강조하는 게 있더라. '송은 독일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엔나에 왔다'가 그것이다. 처음에 고생 많이 했겠다.
"그렇다. 1983년 11월에 비엔나에 왔다. 그때 비엔나는 추운 날씨에 오늘날처럼 개발되어있지 않아서 매우 음울했다. 열흘을 펜션호텔(아침과 저녁 등 2번의 식사를 제공하는 저렴한 호텔)에 머물면서 집을 찾아다녔다. 말도 안 통하고 춥고 한국에 가고 싶은걸 억지로 참았다. 3개월 독일어 어학연수를 받았다. 대학교에 가서 젊은 친구들을 사귀고 하고 싶은 미술을 하게 되니까 비엔나의 삶에 적응이 되더라."

- 처음부터 이렇게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나.
"유학 당시의 꿈은 무조건 그래픽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졸업작품으로 한 쇼룸을 고급백화점으로 꾸몄다. 로고, 유니폼, 디스플레이, 모든 것들을 직접 만들고 소형건축모델도 만들었다. 졸업작품은 잘 만들어져서 외주로 조달까지 되었다.

졸업당시에는 영국의 '로얄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 장학생으로 뽑히기까지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졸업 바로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데다가 전액장학금이 아닌 반액장학금을 받는 조건이었는데 석사까지 딴 상황에서 한국부모님께 또 한 번 유학비용을 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 매장 '송' 내부. 그녀의 패션을 잘 이해하는 고객들이 자주 구매하는 패션아티스트 마지엘라의 옷들이 모여있는 섹션이다.
ⓒ 배을선

"내 제품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 팔고 싶지 않다"

- '송' 숍은 1998년 오픈했다. 결혼은 1987년 했다.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았나?
"결혼과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몇 년 근무했다. 하지만 광고회사에서는 창의력보다는 상업성이 더 필요시 되었다. 물론 광고도 창의력이 필요한 곳이지만 상업을 위한 창의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어떤 깊이를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그만두었고 1992년 5월 딸을 출산하면서 6년 동안 집에서 딸만 키웠다.

딸이 6살이 되자 학교에 가게 되었고 개인적인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있었던 데다가 응용미술이 전공이니 옷가게를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좋은 아이디어로 사업을 시작했다. 98년도 9월 1일 비엔나 1구에 '송'이라는 간판을 달고 오픈한 게 내 사업의 출발이다."

- 얼마 전 비엔나 1구에서 8년된 숍을 버리고 2구의 널찍한 숍(530㎥)으로 옮겼다. 오스트리아 4대 일간지를 비롯해 여러 미디어들이 '송'의 이전과 새로운 모습 등을 뉴스화했다. 당신도 더 유명해졌다. 숍을 옮긴 이유가 무엇인가
"1구는 답답했다. 숍도 작았지만 1구라서 답답했다. 내 숍의 손님들은 단골들이 대부분이거나 숍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다반수다. 하지만 1구에 있을 때는 이 사람 저 사람, 관광객들까지 들어와서 물건들을 둘러보고는 '구찌(Gucci)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싸요?'라는 질문들을 하곤 했다.

패션과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언제나 만족스런 대답을 해줄 수는 없다. 언제나 비엔나 2구를 좋아했는데 마침 넓게 비워진 지금의 이곳을 보고 바로 느낌이 왔다. 그래서 이전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람들의 통행도 드물고, 한산하고 조용하다. 개발도 덜 되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한국식당까지 건너편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한국식당이 옆에 있어서 이전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하지만 보통의 사업가들은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중심가, 시끄러운 대로변, 개발이 잘된 곳을 골라 숍을 마련하는데 당신은 다르다. 패션이 제대로 이해되더라도 많이 안 팔리는 것보단 패션의 이해가 불가능해도 많이 팔리는 게 좋지 않은가.
"나는 내 제품, 그리고 내가 판매하는 제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손님들에게 판매를 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도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제품들이 있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제품들은 소수다. 발렌시아가의 모터백이 그 예다. 워낙 유명한 제품이니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발렌시아가의 제품을 단지 팔기 위해서 숍에 갖다 놓은 것은 아니다.

내 기준에 발렌시아가는 예술성과 상업성이 잘 조화된 우아한 패션을 창조한다. 요즘 잘 나간다고 하는 디자이너들의 옷들을 보면 서로서로 다 비슷하다. 게다가 여성을 우아하고 페미닌하게 연출해주는 옷보다는 천박하다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 될 정도로 이상한, 그러나 고가의 옷들을 선보이고 있다. 발렌시아가는 예술적인 면을 잃지 않으면서 실험적인 패션의 범위를 심하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와 일반인 모두가 소화할 수 있는 패션이다."

▲ 특이한 모자들, 영국과 프랑스등에서 수입한 제품들로 매우 특이하다. 가끔은 팔리는 경우보다 극장의 무대소품으로 임대되는 경우가 더 많다.
ⓒ 배을선

▲ 동물의 발톱처럼 이등분된 부츠들.
ⓒ 배을선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옷들도 일부러 전시"

- 그럼 당신이 판매하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은 한 마디로 어렵다거나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나. 물론 당신의 고객들 중 일부는 일부러 그런 옷들만 찾아서 사겠지만.
"그렇다.(웃음) 내 고객 중에는 실험적인 것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건축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내가 판매하는 옷들 중에는 전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옷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예감하지만 으레 그런 옷들을 사오게 된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사오는 것이다. 이런 것도 패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명품, 혹은 너무 일반적인 것들만이 패션이 아니라 너무 예술적이기에 범상히 다룰 수 없는 것도 패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것들을 보지 못했던 손님들을 계몽시켜주기 위해서 난 그런 옷들을 거리낌 없이 사와서 진열한다. 그러나 가끔씩 그런 옷들이 정말로 판매가 되기도 한다."

- 당신의 패션, 혹은 예술철학은 기성의 아티스트들이 다루지 않는 것을 다룬다. 소외된 것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웃음) 1년에 한두 번씩 패션지를 출판한다. 그 패션지에 모델로 서는 사람들은 유명 배우나 연예인이 아니라 나의 고객들이다. 그들은 나의 숍에서 산 옷을 입고 기꺼이 포즈를 잡아준다. 내가 판매하는 옷들의 디자이너들 역시 상업성으로 가득한 패션시장보다는 창의력으로 가득한 예술시장에서 일한다.

물론 나 역시 패션 아티스트로 옷과 가방, 액세서리 등을 디자인해서 팔지만, 숨어있는 다른 훌륭한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것도 아티스트의 몫이라 생각한다. 워낙 큰 숍으로 이전을 해서 갤러리처럼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이 공간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은 굳이 판매를 위한 게 아니기 때문에 갤러리라는 이름보다는 그냥 '송송'으로 불릴 예정이다. 이 공간에서 아티스트들의 작은 전시회가 열릴 것이다."

- 버나드 빌헬름, 코스믹 원더, 마틴 마쥐엘라, 발터 반 바이렌동크 등이 당신이 판매하는 옷들의 디자이너다. 패션계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이다. 어떻게 이런 디자이너, 아티스트들을 찾아냈나?
"사업을 시작하면서 밀라노와 파리에 여러번 갔다. 밀라노의 패션은 해를 거듭할수록 개성이 없다. 기성화 상업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는 여전히 자기세계를 고수하는 패션아티스트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주목한다.

그들은 패션이 예술의 일부라는 것을, 패션에서는 스타일과 개성이 브랜드와 로고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나는 그런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내 느낌과 해석을 더해 고객들에게 판매를 한다. 때문에 나의 숍은 나 송명일과 동일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귀여운 새들을 머리위로! 매장 '송'에는 50유로에서 8000유로의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들이 판매된다.
ⓒ 배을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보고 화난 이유

- 당신은 패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혹은 사람들이 패션을 어떻게 사고 팔아야하는가.
"작금의 패션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판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유행도 빨리 바뀌고 식상해진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지 말고 나를 위해 사야한다. 한 번은 싸구려처럼 보이는 매우 비싼 가방을 들고 파리의 한 숍에 들어갔다. 숍 직원들이 내 가방만 뚫어지게 쳐다보더라. 한 직원에게 어떤 반지를 꺼내어 보여달라고 했더니 너무 비싼 반지라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더라. 내가 돈없는 뜨내기처럼 보인 것이다. 난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즐겼다.

남에게 보여주기위해 산 가방이었으면 화가 났을 거다. 나는 한 번도 어떤 영화배우가 이 옷을 입었네, 이 가방을 들었네 라고 설명하면서 패션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건 정말 100% 상업이다. 나는 옷을 만든 디자이너에 관해 설명하고, 내 느낌을 전달하고 그 손님이 그 옷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그 손님의 개성도 존중한다. 손님이 그 옷을 정말 입고 싶다고 느낄 때 손님은 그 옷을 사게 된다. 내가 이해하는 진정한 패션과 스타일은 바로 이것이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로 패션이 다시 한 번 화두로 떠올랐다.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 봤다. 보고 난 뒤 화가 났다. 이 영화는 결국 패션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 강조해서 보여주었다. 패션은 예술과 상업이 공존하는 세계인데, 상업과 허영으로만 가득한 패션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보여졌다.

또 이 영화는 지극히 미국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패션의 나쁜 이미지, 즉 허영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물론 예술도 허황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조그만 작품도 천재작가의 작품이라고 값어치가 하늘로 치솟으니까. 하지만 예술은 해석되고 설명되고 인식되고 교육된다."

"한국적인 거 생각보다 잘 팔린다"

▲ 한국에서 천을 사와 직접 제작한 한복 2벌. 특이한 상품을 파는 매장에는 특이한 고객들이 몰린다. 한차원 더 특이한 고객들이 살 것을 고려해 판매중인 가장 한국적인 옷.
ⓒ 배을선
- 숍에 한복 두루마기가 두 벌 걸려있다. 숍의 분위기를 위해서 전시한 것인가?
"한국에서 옷감을 사다가 내가 직접 손으로 바느질 한 것이다. 전시용이 아니라 판매하고 있는 거다. 워낙 특이한 손님들이 많이 오니까 한복을 보고 살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만들어보았다."

- 현재는 바빠서 많은 작업을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앞으로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줄이고 직접 디자인을 더 많이 할 걸로 들었다. 한국적인 걸 모티브로 쓸 예정인가.
"그렇다. 시간이 되면 더 많이 작업할 것이다. 한국적인 거 생각보다 잘 팔린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금은방에서 파는 순금 돼지 펜던트를 많이 사왔다. 순금 돼지에 직접 디자인한 끈과 디테일 등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금세 다 팔렸다."

- 아시아인으로, 또 여성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쨌든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미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민이든 유학이든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싸워야지, 가끔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인들과 경쟁하려는 한국인들을 보면 안타깝다. 유학생들도 예술을 배우러 오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언어를 게을리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를 가든 배우러 가는 거면 뭘 배우든 언어부터 해야 한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뭘 원하고 오는 건지 자신이 알고 오는 거다. 대충 사는 삶에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다. 호기심부터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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