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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첫 시집을 내는 것은 곱게 화장한 신부가 얼굴을 가리고 초례청 앞으로 걸어 나오는 그때의 마음과 비슷하리라.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면서 속마음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신부의 그 마음처럼. 이러한 시인들의 첫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읽는 재미도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진 시인의 첫 시집 <사랑 박물관>(月刊文學출판부, 2004)을 읽는다. '사랑 박물관'이라, 제목이 대단히 구미에 당기는 시집이다. 경북 상주 출신의 이승진 시인은 1980년 '난등'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1년 <문예사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경상북도 영양교육청에 근무하고 있으며, (사)현대불교문인협회, 상주문인협회에서 주로 문단 활동을 하고 있다.

시인 이승진이 만든 '사랑 박물관'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고, 그곳에는 어떤 빛깔의 사랑이 살고 있을까?

ⓒ 한국문인협회(월간문학 출판부)
빈 돛단배라도 아름다울 것이다.
빈집이라도 고마울 것이다.
명월이 만공산할 자리라면 더욱 좋겠다.
맑은 터를 골라 사랑 박물관 하나 짓고 싶다.
툭툭 깨어지던 타제석기 첫사랑
오순도순 걸어나오는 빗살무늬토기 속의 빗금들이
다시 손을 잡는다.
호동 왕자, 낙랑 공주
황진이와 總角 그리고 어린 임제
심순애와 이수일, 윤심덕, 전혜린의 사랑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아픈 짝사랑 편지도 한 쪽 넣어
긴 태풍을 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하나 둘 탑을 올리는
사랑 박물관 한 채 지어 보고 싶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지
사는 건 사랑하는 것이겠지

- 시 '사랑 박물관' 부분


'사랑'이다. 이승진 시인, 그가 처음으로 지어 올린 언어의 집인 <사랑 박물관>은 제목 그대로 사랑으로 만들어진 집이다. 인용한 시 끝 부분의 언표처럼 그는 지금껏 살아온 것이 사랑하는 것이었고, 앞으로 사는 것 또한 사랑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지금, 여기에 온 유한자의 짧은 내 삶에 사랑만으로 살아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남을 미워하거나 싸우거나 증오할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이 시인은 "사랑 박물관 지어 가는 도목수로 살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완성된 사랑 박물관의 관장이 아니라 사랑 박물관을 지어가는 도목수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만들어져 있는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과정 속의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사랑이다. 이승진 시인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도목수가 되고자 한다.

시집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제1부가 '가을-빈 토끼집'이고, 2부는 '겨울-양정역에 서서', 3부 '봄-어느 3월의 구구단', 4부 '여름-삼엽충'으로 되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고, 가을-겨울-봄-여름이다. 하기야 4계절이라는 시간의 순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시집 2부에는 대체로 아버지, 어머니, 숙모 등의 가족의 힘겨운 삶과 그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3부에서는 시인이 근무하고 있던 분교 아이들의 삶과 그들에 대한 시인의 지극한 사랑의 빛깔이 넘쳐나고 있다.

'화산 분교 풍경', '어느 3월의 구구단', '재갑이 신발 자리에는', '미술 시간' 등의 시편에는 "3학년 여섯, 6학년 일곱의 복식 학급"인 시인이 근무하고 있는 화산 분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집 <사랑 박물관> 1부와 4부에서는 사물(事物)과 세상살이의 본질과 이면을 파고드는 시인의 감각적인 언어가 다채로운 무늬로 펼쳐져 있다.

가을 운동장은
운전 면허 시험장이다.
저 많은 응시자들이 떨어지려 모여 있다.
녀석들,
푸른 수입증지를 덕지덕지 붙여 오더니
오늘은 바람을 탄다.
T코스에서 헤매던 것들이
S코스를 유영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완성된 후진을 하며
끝까지 흩날리기도 한다.
몇 놈은 벌써 도로 중행 시험이다.
이-뿌-다
한 놈 한 놈 떨어질 때마다
기러기 날아가며 합격 벨을 울린다.
기럭 기럭 기럭 기럭
이 운전 면허 시험장은
잘 떨어지는 것이 합격이다.
참 좋은 가을이다.

- 시 '낙엽' 전문


경북 상주시 모서면 화산분교 가을 운동장에 떨어지는 낙엽들의 이모저모를 그려나가는 시인의 감각적인 필체로 마치 낙엽들의 '가을운동회'를 보는 듯하다. 그러니까 낙엽은 분교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기도 하며, 또 일생을 살다가 되돌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낸 대유(代喩)이기도 하다.

"잘 떨어지는 것이 합격이다"라는 마지막 시행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잘, 살다 가는 우리 삶의 본질을 붙들고 있다.

이승진 시인은 시 '수학1-가 99쪽'에서 "사랑을 사랑이라고 쓰고/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의 사랑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사랑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사랑의 도목수' 이승진 시인의 사랑 노래는 계속 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승진 시인이 발간한 <사랑 박물관>에 한 번 들어가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에도 송고할 계획입니다.


사랑 박물관

이승진 지음, 한국문인협회(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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