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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 등봉 내내 지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작은 애.
대청봉 등봉 내내 지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작은 애. ⓒ 김은주
우리는 올라갈 때 만난 아줌마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산 길을 오색코스로 결정했다. 오색코스가 대청봉 올라가는 길 중 가장 단거리 코스라 올라가는 데 5시간이면 내려가는 데는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그 아줌마는 말했는데 내려오면서 그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 정보에는 분명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색코스는 남설악 매표소에서 시작되는 코스로, 대청봉까지 급경사인데다 바위가 많아 길이 좀 험한 편이었다. 내려오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채 헉헉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오색으로 올라오지 않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계령 코스를 택한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오색과 한계령을 비교했을 때 오색은 급하게, 그러나 짧게 이고, 한계령은 오래 걷지만 힘이 분산돼서 좀 느긋하게 갈 수 있고, 또 산을 즐기기엔 한계령 코스가 더 맞는 것 같다. 오색은 그야말로 고행을 연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한계령보다는 빨리 산을 올라갈 수 있는 대신 한계령이 올라갈 때 느끼는 고통을 짧은 시간 안에 다 겪어야 하는 걸 보니 인생에 에누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색으로 내려올 때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폭포가 있기 때문이다.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물이다. 그러나 워낙 차가워서 잠깐 담가도 정신이 번쩍 들고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다.

이런 장점도 있지만 오색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정말 고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적극 말리고 싶다.

인생에 에누리는 없다

급경사 돌계단을 정말 끝도 없이 내려왔다. 오르막이 심한 길은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오는 것도 만만찮다. 올라가느라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인지, 아니면 내려오는 건 오색 길을 타면 금방이라는 말을 너무 과신했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길었다. 가도 가도 끝나지가 않았다.

마침내 내 몸에 남아 있던 에너지가 다 소진됐는지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넘어지면서 풀풀 날리는 흙을 타고 쭉 미끄러졌다. 조금만 더 미끄러졌다가는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구를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작은 애가 다가와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는데 나는 흙을 털어낼 기운도 없어서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힘이란 힘은 다 빠져버려 비틀거리며 걷는 나와 달리 작은 애는 여전히 활기가 넘쳐보였다. 벌써 10시간째 걷고 있는데도 대청봉에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힘이 넘쳐 보이는 작은 애를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애는 내려오면서 신기한 꽃이 있으면 따서 갖고 놀고, 도토리를 줍기도 하고 계단 길을 놔두고 비탈길에서 미끄러지기를 하면서 나름대로 즐기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어른들도 힘들어서 죽을 지경인데 나약한 아이들이야 오죽하랴, 이런 생각을 뒤집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아저씨는 딸 아인인 작은 애에게 장군감이라는 말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작은 애에게 등산은 힘든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평소에 밖에서 많이 노는 아이에겐 등산도 밖에서 노는 놀이의 연장일 뿐이다. 우리 어른들처럼 묵묵하게 올라가고 묵묵하게 내려오는 게 아니라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걸 들으면서 소리를 흉내내기도 하고, 꽃도 따고 미끄럼도 타고, 또 수시로 오이를 달라 사탕을 달라 하면서 계속 맛있는 것 먹지, 재미있는 놀이 찾아내지, 지나가는 어른들이 칭찬도 해주지,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시간이다.

등산을 놀이로 인식한 이상 10시간을 꼬박 걸었다 해도 그건 놀이지 힘든 등산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작은 애는 평소에도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편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약골이라 쉬는 날도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에서 편하게 텔레비전 보는 걸 즐기는데 이 애는 집에 있으면 우리에 갇힌 짐승마냥 답답해 했다. 그래서 "엄마, 현관문이라도 열어놓으면 안 돼"라고 말할 정도로 밖으로 쏘다니는 걸 즐기는 애니 등산이 오죽 좋겠는가.

그러고 보면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말은 참 맞는 말인 것 같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를 것이다. 힘이 넘치고 활동적인 작은 애를 집 안에 가만히 놔둬도 안 되고, 큰 애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애는 활동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직업을 찾아주고, 큰 애에게 어울리는 안정적인 일은 뭐가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남설악 매표소의 지붕이 보였다.

남설악 매표소, 종착지에 도달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는 13시간 동안 산에 있다고 내려온 것이다. 정말 의미 깊게 보낸 하루였고, 우리 가족사에서 길이 남을 그런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휴일에 가족과 함게 한계령으로 해서 대청봉에 올랐다가 오색코스로 내려왔습니다. 가족을 더 이해하게 된 의미 있는 등산이었습니다. 군에 다녀온 사람이 한동안 군대 얘기만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대단한 등반이었기에 할 말이 많고, 그래서 3회에 걸쳐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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