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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웬일이세요?"
며칠 전 집주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응, 다름이 아니고 집을 팔아야 할 것 같아서 내 놨어요. 내일쯤 집을 보러 간다니까 집에 좀 있어줘요. 알았지요?"
"네!"
대답을 해놓고 전화기를 내려놓는데, 걱정말라는 주인아줌마의 말과는 달리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계약만료가 얼마 남지 않아 이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른다, 오른다 하더니 우리집도...
얼마 전부터 슬슬 돌기 시작한 재개발 소문에 암암리에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피해가 뭔가? 운이 좋으면 내 앞으로 떨어질 소위 '딱지'를 기대하며 어떻게든 재개발이 되는 그날까지 버텨보려는 심산이었는데, 오르는 집값에 눈물 흘리는 건 역시 힘없는 세입자들이다. 재개발이 시작되기도 전에 딱지 대신 '딴지'가 걸려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생긴 것이다.
'그래 이 참에 있는 돈 없는 돈 싹싹 긁어서 아들녀석이 그리도 원을 하는 넓은 집으로 가서 주일마다 거실에서는 조기축구를 하고, 친구들 다 불러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집들이도 하고, 또 포개놓고, 엎어놓고, 세워놓고, 끼워놓은 살림살이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고 쓸고, 닦아가며 살아보자' 싶다가도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는 집값에 이사를 갈 수나 있을는지 걱정도 되었다.
뜨다 만 밥술을 아예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와 통장을 뒤적거리며 계산기를 두드려보지만 전세보증금에 청약저축을 해약하고, 보험대출까지 받는다 해도 있는 사람들 기준에서 보자면 하루 저녁 유흥비도 안 되는 돈이다. 이 돈으로 이사를 가봤자 이사비만 날리고 평수나 수준은 이보다 비슷하거나 못한 곳으로 밖에는 가지 못 할테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허리가 휘든 꺾이든, 결국에 가서는 빚잔치로 끝나든 말든 판교분양 때 분양신청이라도 해볼 걸, 후회가 되었다.
'성남 거주 15년 이상, 35세 이상, 무주택 가장'으로서 성남시민에게 주어지는 특별분양 대상자였던 우리였건만 평당 1000만원이 넘는 분양금에 지난 몇 년 동안 매달 청약금을 부어온 우리였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분양신청마저도 포기해야만 했다. 혹시 운이 좋아 분양을 받게된다고 해도 당장 마련해야 할 계약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판교 로또' 도전해 볼 걸 그랬나
분양신청을 포기했다는 나에게 "왜 그랬어? 분양만 받으면 완전 로또 맞는 건데, 대출 다 해주잖아"라며 혀를 차지만,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대한민국에 귀 달리고 입 달린 사람이면 판교분양이 평생 이루고 싶은 소망 중 하나였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1000~2000만원도 아니고 '억' 소리가 나오는 금액을 대출 받으면 이자부담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비록 오래된 벽지의 얼룩을 가리는 액자로 전락해버린 자격증일지라도 나 역시 진작 시대에 발맞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놓은 터다. 나 역시 이 나라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미래의 '복부인'을 희망하는 한 사람이다.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계약금이 없어서"라고 해명하기는 싫었다. 그냥 "저는 집에 관심없어요"라는 말로 내 자신까지도 위로해야 했다.
그런데 그나마 정붙이고 살던 이 집에서도 나가야 한다니 없는 놈만 죽어라 죽어라 하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주인아줌마의 얘기를 전했다. 돈 때문에 이렇게 추운 날에도 가게가 아닌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은 벌써부터 거칠어져 있었다.
그 얼굴에서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이사 가라면 가야지 근데 걱정하지마!! 설마 우리 네 식구 살 집 하나 없겠냐? 미리부터 걱정하면 병 생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편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지 차려놓은 밥상을 얼른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래도 정 들었는데…."
뒷말을 채 맺지 못한 채 남편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지리한 초겨울 밤은 그렇게 남편과 나의 한숨으로 채워졌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았던 점쟁이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서른 세 번 이사 할 팔자야!!"
그때는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이 되려나 보다.
서민의 가장 든든한 '빽'은 '객기' 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7만원 하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1년을 살다가 큰 아이를 낳을 무렵 방이 두 개에 작은 부엌이 달린 지하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이사를 생각하고 집을 구할 때 다른 조건은 하나 필요 없었다. 그저 화장실이 집안에 있고, 햇볕이 드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남들은 감사한 줄도 모르고 누리는 집안 화장실과 햇볕 한 줌이 나에게는 사치라도 되는 듯 집은 쉬이 구해지질 않았다.
그때도 역시 돈이 문제였다. 이 가격에는 절대 못 준다는 주인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사정해서 겨우 계약을 했고, 그날 밤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벅참으로 잠이 들지도 못했었다. 그날의 설렘이 꿈속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며칠을 이사하던 날의 설렘을 여비 삼아 요즘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돈으로는 이사가 아닌 그냥 눌러앉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는 냉정한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돈은 없고, 집은 팔린다 하고, 겨울은 다가오고, 갈 곳은 없으니. 하루종일을 이유도 모른 채 엄마를 쫓아 다닌 아이의 눈꺼풀은 벌써부터 천근만근 무게로 하강하고 있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아직은 내 집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그때는 뭐 돈 있어서 이사했나?"
'객기'가 발동을 했다. 돈 없고, 집 없는 내게 객기는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객기로 신발이 닳도록 발품을 팔다보면 틀림없이 새로운 쉴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돈?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게 돈이고,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데 그것도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정 안 되면 어쩌겠는가? 포개놓고 엎어놓은 살림살이를 머리에 이고 지고 하더라도 우리 네 식구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면 옮겨가는 수밖에.
어딜가든 어디에 있든 결국엔 "엄마, 빨리 집에 가요, 우리집이 세상에서 제일 편해요!" 하는 그 아이들이 또 다른 설렘과 기대로 부를 수 있는 내 집(비록 문패에 남편과 내 이름이 새겨지지는 않았지만)이 빨리 구해지기를 바라며 잠버릇 고약한 아이들이 발치로 걷어 차버린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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