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상투를 잡았다. 한두 사람의 상투가 아니다. 한나라당 내 경쟁자는 물론 열린우리당의 상투마저 잡았다. 대운하 건설 계획 하나로 정치적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나타나는 모양새는 일단 정반대다. 이명박 전 시장이 공격을 받는 양상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운하 구상은 국정운영이나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건설 계획안"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운하가 경제정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고 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도 공격에 나섰다. "70~80년대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나 몇 개의 산발적인 프로젝트로 선진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라며 "과거 개발시대 패러다임을 갖고 21세기 선진강국을 만들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비판이 사납고 매서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명박 전 시장 입장에선 응원가다.
대운하 건설 계획, 민심 포획 성공?
박근혜 전 대표나 손학규 전 지사가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신의 홈그라운드에 경쟁자를 끌어들였으니 흥행 수입은 모두 자기 몫이다. 이게 중요하다. 이명박 전 시장은 대선 이슈를 선점했다.
선점했을 뿐 아니라 확대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오늘자에서 한 면을 털어 대운하 건설계획 논란을 심도 있게 다뤘다. 다른 언론이 간헐적으로 이명박 전 시장의 '구상'을 전한 적은 있지만 대운하 건설계획을 '이슈'로 격상시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명박 전 시장은 기선을 잡았다. 혈맥에 침을 꽂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내년 대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것이라는 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열린우리당의 대선주자들도 한결같이 평화와 함께 번영을 운위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전 시장이 물꼬를 텄다. 다른 대선주자들이 먹고 사는 게 나아져야 한다고 원칙을 읊조릴 때 이명박 전 시장은 방법을 내놨다. 다른 대선주자들은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는데 이명박 전 시장은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은 밑질 게 별로 없다. 사안이 다름 아닌 정책이다. 찬반은 있을지언정 정답을 도출하긴 어렵다. 경쟁자가 아무리 인파이팅으로 나와도 KO패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공약이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상기하면 된다. 이회창 후보가 뒤늦게 비판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행정수도 공약이 부실덩어리인지 여부보다는 비전을 선점했다는 점이 더 주효했고, 지역민심을 움직인 당장의 소득이 컸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도 그렇다. 그의 대운하 건설계획이 날림인지 아닌지는 가릴 대상이지만 그 작업엔 시간이 걸린다. 그보다는 먼저 혜택에 눈길이 갈 공산이 크다. <동아일보>가 대운하 건설계획의 '기대효과'와 '부작용'을 대비시킨 도표를 보면 아주 명징하게 나와 있다.
'부작용' 항목은 이런 것들이다. 물류비 절감효과 근거 없음, 내륙개발 계기 될지도 미지수, 생태계 교란, 수질 악화, 골재시장 교란 가능성 등등.
'기대효과'는 이렇다. 중부 및 영남의 낙후지역 개발, 경기부양 및 일자리 창출, 운하 유람 등 관광사업 활성화 등등.
따져보자. 목구멍이 포도청이 된 지 오래다. 포도청을 넘어 의금부 수준으로 올라가 버렸다. 당장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경제 공약이 국민을 유혹할 여지는 매우 넓어졌다.
유혹 대상도 구체적이다. 경부운하와 호남운하는 국토를 'ㅅ'자 형태로 가른다. 물길이 경기 남부와 충북을 거쳐 영남과 호남으로 나아간다. 충북과 영남을 다지고 경기와 호남을 공략하는 대선 진군로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얻는 만큼 내놓을 것도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의 '개발전략'이 붕괴사고를 부를 수도 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대통령, 누가 될까
음미해 보자. 손학규 전 지사는 대운하 건설계획을 비판하면서 '개발시대 패러다임'과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문제 삼았다. 이게 고리, 아니 고삐가 될 수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이 대운하 계획을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청계천 프로젝트가 있고, 건설사 사장 출신 이력이 있다. 이것을 대운하 계획과 짝 지으면서 국민을 먹고 살게 해 줄 대통령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꽤 괜찮은 이미지 같지만 이게 그늘이 될 수도 있다. 독점은 견제를 부른다. 자신의 이미지를 '개발'로 굳히면 경쟁자들로 하여금 개발 폐기물을 찾게 만든다. 개발과정의 각종 비리와 결탁과 같은 사례들이다. 만에 하나 어느 사례 하나가 이명박 전 시장의 머리 위에 얹혀지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만든 홈그라운드가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자. 순기능이 있다. 이명박 전 시장 때문에 대선주자들은 경제비전을 더 날카롭게 다듬어야 하는 상황에 몰렸고, 국민은 미래 경제비전을 제대로 비교 평가할 기회를 얻게 됐다.
판단은 천천히 내려도 좋다. 아니 천천히 내리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