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야, 피아노 학원 다녀볼래?"
10년 전 강화도 농촌에 처음 이사왔을 때 갓 1학년이 된 큰 딸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대답이 뜻밖이었다. "아빠, 바빠서 안돼" 어라! 꼬마 녀석이 뭐가 바쁘다고. 말인즉슨, 놀기 바빠서 학원갈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하긴 도시에서 살다 시골로 와 맘에 맞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집 옆 느티나무와 산과 들에서 맘껏 뛰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8살 꼬마도 바빠서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이 없다는데, 하물며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바쁠까? 또 돈 쓸 일은 얼마나 많을까?
대학 졸업 20주년 행사를 앞두고 단과대 학장으로부터 이메일과 편지가 왔다.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고 있겠지만, 00법대는 여러 측면에서 큰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로 이어지는 모교발전기금에 대한 간곡한 부탁이다.
중간 연락책인 동기의 전화도 이어졌다. 그런데 돈 쓸 곳이 하나 더 생겼다. 늦은 나이에 유학 가서 학비를 보태줘야 하는 동기 소식이다. "우리 동기들이 000만원을 맞춰줘야 이번 학기 등록할 수 있대. 성의껏 보내라" 또 어려운 3원1차방정식 문제다.
모교발전기금 x, 동기지원금 y, 내 지출 가능한 금액 z. 단, x와 y의 합은 z보다 작아야 한다. 그런데 x, y, z 모두 값이 정해져 있지 않은 변수다. 문자(변수)가 3개고 식이 하나인 이 문제는 고등학교 수학으로는 풀 수 없는 방정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런 난해한 문제들을 풀어야만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실 사회생활에 비하면 그건 참 쉬운 문제다. 수학에서는 주어진 조건은 명확하고 주어지지 않은 조건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삶에서는 무엇이 주어진 조건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내에서도 생각할 게 많다.
발전기금이나 동기지원금 액수를 숫자로 지정해 주지 않아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발전기금 50만원, 동기지원금 20만원이라고 통보받았다 해도 낼 것인지 말 것인지, 인간관계와 유학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고려 등을 생각하다 보면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오게 된다.
돈 문제 역시 선택과 포기가 중요
재무설계를 한다고 하면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누가 월납 30만원짜리 변액보험을 권유하는데, 가입해야 하나요?" 아, 불행하게도 이 역시 수리나 금융공학만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다.
수많은 재무수치와 본인의 선택과 포기에 따른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는 갑돌이에게도 맞고 갑순이에게도 맞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야 다행이지만, 둘 다에게 틀린 대답일 수도 있다(그런 뜻에서 훌륭한 재무상담사는 부분 상담을 하지 않으려 한다).
선택과 포기라는, 사람의 의지가 빠지면 어떻게 될까? 1991년 소련이 망했을 때 어느 논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100명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려면 100대의 슈퍼컴퓨터로도 불가능하다" 어차피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그런 식으로 사람의 의지와 감정이 빠진 문제라면 내게 닥친 1차방정식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슈퍼컴퓨터로 안 되는 문제를 우리는 '선택과 포기'라는 비법(秘法)으로 푼다.
그 비법을 단련시키는 것이야말로 인생재무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이것을 '돈 다루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돈 다루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그것은 소득이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과제다. 돈 다루는 힘의 차이에 따른 선택과 포기는 개인의 재무지도를 각기 다르게 보여준다.
[선택과 포기 1] 가정평화를 위해 미래 은퇴자금 포기
50대 초반인 박씨는 개원 17년째인 제법 성공한 의사다. 자녀 둘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건물(자산가치 13억원) 임대소득이 월 600만원이고, 병원 평균수입은 월 2천만원이다. 그렇다고 근무시간이 빡빡한 것도 아니다.
6시면 퇴근하고, 수요일 오전도 쉬며, 토요일과 일요일은 당연히 쉰다.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시가 10억원이 넘고, 그 외 연금과 펀드를 비롯한 금융자산도 넉넉한 편이다. 이렇게 넉넉한 박씨지만 은퇴를 준비하면서 맘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돈은 박씨가 벌지만 사실 호강은 부인과 자녀들이 한다. 전에는 자녀 둘이 부인 카드를 함께 썼는데, 셋이 쓴 신용카드 대금이 800만원이나 된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는 자녀들 용돈을 월 1백만원씩으로 제한하고 있다. 부인에게 주는 월 생활비는 1200만원이다. 박씨 본인은 150만원만 쓴다. 나머지는 적금과 보험 등에 불입하고 있다.
박씨는 58세에 은퇴하고자 한다. 부부가 80세까지 살 것으로 가정하고 은퇴 후 자금을 계산해 보았다. 은퇴하고 나면 일할 때보다 아무래도 돈 쓸 시간이 많아질 테니 박씨 용돈은 50만원 늘려 200만원으로 늘리고, 생활비는 1200만원 그대로 두었다.
생각보다 자금이 많이 모자랐다. 게다가 80세 이후까지 더 살면 어쩌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건 현재 주택을 시세 5억원대 아파트로 옮겨 그 차액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럼 모자라는 은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할까? "현재 생활비에서 200만원을 줄여보겠네."
그러나 다음 상담 때 박씨는 말을 바꾸었다. "아내에게 생활비 줄이라는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네" 아내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여유자금 2억원도 부인에게는 모자랐다. 거기에 1억원을 보태 골프회원권을 사고 싶다고 했다. 회원권 프리미엄이 오를 거라는 나름의 재테크 전략도 깔려 있었다. 또 부인은 보험이 전혀 없었다. '남편이 보험'이라는 생각이다. 틀린 것만은 아니다(후에 월납 10만원짜리 손해보험 상품에 가입).
현재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박씨는 미래의 은퇴자금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10년만 일찍 (재무)상담 받았더라면, 생활비가 이렇게 늘지는 않았을 거야" 굳어진 생활습관을 이제 바꾸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신 아직 미혼인 두 자녀의 상담을 부탁했다.
[선택과 포기 2] 미래 재무안정을 위해 현재 쾌락을 포기
올해 초 결혼한 천씨(30)는 지난해부터 시골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다. 역시 의사인 아내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천씨 급여가 많지는 않지만 아내 수입이 있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될 형편이다.
지금 아니면 평생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게 아내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은 쓰면서 살고, 대출 받아 병원 문 열잖아요?" 그러나 천씨 생각은 다르다. 3억원을 대출받으면 1년에 원금의 30%인 9천만원을 갚아야 하고, 이자로도 1800만원(6%)이나 나간다.
개원해서 자리잡기도 쉽지 않은데 월 900만원씩이나 원리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면 너무 큰 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소비지출도 꽤 늘어난 상태라 줄이기도 쉽지 않다. 선배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개원하고 오히려 더 힘들어 병원에 매여 사는 모습이더라는 것이다.
천씨는 공중보건의로 나가기 전인 지난해 초에 재무상담을 받았다. 그때 천씨 계획은 이랬다.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개원할 때까지 1억원을 모은다. 1억원은 집안에서 빌리고 나머지 1억원만을 대출받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급여제의사로 시작해서 개원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공중보건의로 나가기 전 이미 1천만원을 모았고, 퇴직금이 700만원 가량 된다. 그리고 1년에 약 2500만원씩 저축하기로 했다.
[선택과 포기 3] 각자 생활은 존중하고 미래 큰 그림은 협의
대기업 인사부 과장인 오씨(30대 후반)와는 직원들에게 재무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협의하기 위해 만나는 사이다. 늘 하던 대로 오 과장에게도 직접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과장님이 직접 받아봐야 직원들에게 어떤 점이 좋을지 생생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 과장은 취지를 충분히 알겠다며 사양했다.
이미 재무상담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 다른 회사 담당자들을 만나고 온 다음 다시 만났다. 내년 사업계획에 반영하려고 보고 중이라고 했다. 다시 권했다.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라도 과장님이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습니다" 이번엔 받아볼 생각이 있는 눈치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에 갸우뚱한다. 맞벌이 부부인데 언젠가부터 서로 통장관리를 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부가 서로 말하지 않는 비밀스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체크카드로 해도 연말정산 다 되죠?" 얼마 전부터 신용카드 인생이 돼버린 것 같아 외상인생을 청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똑같아요. 월급날이면 카드대금으로 다 빠져나가거든요" 기본 지출관리가 안 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 맞벌이 부부니까 소득이 꽤 되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사실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내놓고 새 판을 짜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각자 개별 영역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일정 정도는 따로 떼놓고 할 수도 있죠" 사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잘 안 되기도 한다. 게다가 돈에 관해서라면 더욱 더 얘기가 꼬일 수 있다.
그런 점은 인정한다 해도 함께 가야 할 재무여정의 굵직굵직한 대목들은 같이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오 과장은 타협했다. 큰 재무목표와 공통 생활비 부분만이라도 함께 협의할 계획을 세워보겠노라고.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의 일대일대응 해법은 선택과 포기
세계의 중심은 로마나 뉴욕이 아닌 바로 '나'다. 적어도 내 삶의 주체인 나에게 있어서만은 절대로 그러하다. 그런 나의 선택기준은 바로 나의 가치판단이어야 한다.
세상과 돈에 끌려다니지 않고 살기 위해서다. 이런 원칙이 서 있다면 포기는 결코 실패나 나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내 안으로부터 우러난 것(自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정답이라고 하는 것만을 쫓아서는 일시 성공할 수는 있어도 진정 성공할 수 없다. 나아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돈과 자원은 상대적으로 정해져(有限) 있다. 우리의 바람은 상대적으로 무한하다. 유한과 무한은 고등학교 수학으로는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 난해한 고등수학을 풀면서 산다. 바로 선택과 포기의 비법을 활용해서다. 그 비법은 하루 아침에 깨달아지는 게 아니다.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누구나 다 잘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아무나 다 잘 하는 건 아니다.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학교 다닐 때는 놀지 말고 공부해라. 근무할 때는 놀지 말고 일해라. 이제 이런 문구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으면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불나비처럼 뛰어들던 시대정신에서 이제 해방될 때다. 올바른 재무설계는 돈과 자유 그리고 행복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덧붙이는 글 | <뉴스메이커>에도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