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게 살아가던 역사 교사가 있다. 그는 동료의 추천으로 기분 전환할 수 있는 비디오를 보게 된다. 비디오는 정말 기분 전환용으로 한두 번 웃게 해주는 그런 B급이다. 그런데 남자에게 그 비디오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5년 전에 만들어진 비디오 속에서 5년 전의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플갱어'를 알게 된 것이다.
도플갱어를 다루는 창작품들은 그것에 대한 접근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도플갱어라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개념 자체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그것을 다룬다면 어떨까? 단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눈이 먼다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인간의 본성 깊은 곳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었던 저자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한번 상상을 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도플갱어가 영화에, 비록 단역이지만 분명히 나온 그것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단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역사 교사도 그렇다. 고민 끝에 그 영화사에서 만든 비디오들을 모조리 찾는다. 그런 뒤에 도플갱어가 나오는 영화를 따로 분류하고, 그것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을 찾아낸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이름을 알아낸다. 그리고 얼마 뒤 계략을 써서 영화사를 통해 그 배우가 사는 곳을 알아내게 된다.
다시 한번 상상을 해보자. 도플갱어가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실제로 보고 싶을 것이다. '호기심'이라는 단어가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궁금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만 하고 돌아갈 것인가? 그런 뒤에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교사는 그럴 수가 없다. 목소리까지 똑같고 몸의 흉터까지 똑같은 존재를 잊을 수가 없다. 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고, 또한 누가 '진짜'인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교사는 연락을 한다. 도플갱어와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당사자들 외의 존재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도플갱어>를 이끌어가는 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똑같이 생긴 교사와 배우, 두 명이다. 두 번째는 '제3자'인데 직접 개입하는 경우는 적지만, 이들이 있어 작품은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작품은 이들의 눈을 통해서 진짜 '나'에 대한 의미를 묻기 때문이다.
교사와 배우는 도플갱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모른 척하자고 합의한다. 그러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제3자는 어떨까? 가령 배우의 아내는 어떨까?
어느 날, 외박하겠다는 남편이 일찍 들어올 수 있다. 평소처럼 함께 식사를 하고 포옹을 한 뒤에 잠자리에 들 수 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도플갱어라면 어떨까?
아니면 길거리에서 남편이 누군가와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해서 가보니 남편은 아내를 못 알아본다. 도플갱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도플갱어인 줄 알았는데 진짜 남편이라면 또 어떨까?
이럴 때,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옷과 같은 외양적인 것이다. 하지만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떤가? 알아볼 도리가 없다. 만약 당사자들이 서로 약속을 하고 옷을 바꿔 입은 채 삶을 바꿔도 주변에서는 알지를 못한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비극적이게도, 옷과 같은 외양적인 것이 아니면, 극단적인 사례로 발가벗고 있으면 '진짜'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상상들을 접고 이번에는 답변을 준비해보자. '진짜 나'란 무엇인가? '진짜 나'라는 것을 증명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과 함께 빚어진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는 희극적인 상황에서 비극을 만들어낸다. 오싹하면서도 서글퍼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들의 심리가 날카롭게 묘사된 만큼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듯, 여정의 끝에 만들어진 여운은 어느 소설 못지않게 깊다. 게다가 인간을 증명하는 중요한 것까지 생각할 기회를 준다. 문학이 인간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야할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도플갱어를 만난다는 다소 만화같은 소재를 들고 찾아온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소재는 엉뚱해도 그 끝은 강렬하고 또한 진지하다. 작가의 명성이 헛되지 않은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알라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