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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의 노량진-제물포간 33.2km를 첫 개통한 후 올해로 107년이 흘렀습니다. 호남선은 경원선과 함께 1914년에 개통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수많은 간이역이 생기면서 도시와 시골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지요.

필자도 어렸을 때가 생각납니다. 시골 친척집에 갈 때면 기차를 이용하여 갔는데, 그 당시 집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찐 계란을 먹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기차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 인심 또한 후해 어린 저에게 먹을 것을 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 용동역 역사, 출입문이 완전 봉쇄되어 있다.
ⓒ 오명관
지금은 KTX를 비롯하여 새마을호, 무궁화 등은 주요 도시에만 정차하다 보니,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골마다 있었던 간이역에 정차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때론 정차가 길어지면 잠시 기차에 내려 바람도 쐬고 때론 국수도 먹으면서 여유를 부렸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교통수단과 자가용의 보급으로 이젠 느릿느릿 다니는 기차는 사라지고,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도달하는 열차로 바뀌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시골에도 웬만해선 자가용이 있고, 주요 노선마다 버스가 운행하니 이젠 간이역이 해야 할 일이 점점 사라진 것이지요.

▲ 용동역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나 간이역은 정차하지 않는다.
ⓒ 오명관
그렇지만 왠지 아쉬운 점이 남습니다. 간이역이 없어지듯 우리의 시골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은 없고 노인들만 있는 시골.

더구나 버스조차 적자운행이라는 이유로 점점 노선이 사라지거나 배차간격이 더욱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젊은 층은 자가용으로 도시로 나가고 외지로 갈 수 있지만 시골에 남아 있는 노인분들은 그 어떤 교통수단도 직접 운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차가 큰 위안거리였지만 이마저 사라지고 없으니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도시로 간 뒤 다시 갈아타야 하는 불편도 감수해야 합니다.

▲ 용동역을 알려주는 이정표, 그러나 쓸쓸하게 홀로 역사를 지키고 있다.
ⓒ 오명관
그리고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간이역은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농사지은 농산물을 팔기 위해 새벽 기차를 타러 나오던 할머니, 아들 딸 보러 도시로 가기 위해 허름한 양복을 깔끔하게 다려입은 할아버지 등 삼삼오오 모여 기차가 올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또 통학하기 위해 새벽이슬을 맞으며 하나 둘 기차역으로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어른들께 인사하며 그날 하루를 시작했던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단발머리 여학생들.

이제 이러한 풍경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추억의 간이역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고 해체되는 날만 기다리듯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 점점 도시화가 되면서 마음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 같은 우리의 농촌, 간이역이 사라지듯 시골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있어 가슴이 저려움을 느낍니다.

전북 익산시 용동면 용동역

필자는 전북 익산시 용동면에 있는 한 천(川)에다가 누군가 몰래 폐수를 버리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하러 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간이역이 눈에 띄어 잠시 머물다가 왔습니다.

이곳은 익산시 용동면에 있는 '용동역'. 남으로는 전북 익산시 함열읍, 북으로는 충남 논산시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입니다.

폐허처럼 변해 있는 간이역을 보고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고자 사진과 영상을 담아봤습니다. / 오명관

덧붙이는 글 | 익산시민뉴스, 서울방송 유포터,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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