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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앉아있는 엘크 암사슴
눈 위에 앉아있는 엘크 암사슴 ⓒ 성락

보름 전쯤인가, 사슴방목장이 내려다보이는 사료포(사슴먹이용 수단그라스를 재배하는 밭)에서 풀을 베다 잠깐 숨을 돌리게 되었는데….

방목장에서 풀을 뜯던 암사슴들의 시선이 모두 산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모두 한 방향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듯 긴장된 모습들이다.

자연히 사슴들이 시선을 향하고 있는 곳으로 필자의 시선도 옮겨갔는데, 방목장 밖에 웬 시커먼 짐승이 서성거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한 눈에 꽃사슴임을 알아차린 것은 16년 전 꽃사슴으로 농장을 시작했던 필자로서는 당연한 일.

덩치가 큰 엘크로 전환한 지 3년이 지난 이곳에 난데없이 꽃사슴이라니. 여하튼 이놈은 나이가 어려 보이는 수사슴이었는데, 발정기를 맞아 엘크 암놈들이 내는 소리와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온 것이 확실했다.

쉽게 거리를 주지 않는 꽃사슴
쉽게 거리를 주지 않는 꽃사슴 ⓒ 성락

놈은 어떻게 해서라도 암놈들이 있는 방목장 안으로 들어와 보려고 여기저기 틈을 찾고 있었다. 사실 안에 들어오면 자신보다 덩치가 두세 배는 더 큰 엘크 암놈들의 발길질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한데, 놈은 이를 모르는 듯했다.

놈은 아마도 인근에 있는 농장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야생 사슴은 없거니와 혹 있더라도 인위적으로 뿔을 자른 흔적이 있는 이 놈은 적어도 야생이 아닌 사육되던 가축임이 분명했다.

놈에게 사료를 주기 시작했다. 축사와 가까운 철망 밖으로 배합사료를 던져 주었는데, 놈은 한참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내려와서 게눈 감추듯 사료를 먹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먹이 주세요." 살피는 꽃사슴
"먹이 주세요." 살피는 꽃사슴 ⓒ 성락

며칠이 지나면서 이제는 저녁 시간이 되면 마치 맡겨놓은 먹이를 찾아먹으러 오듯 뻔뻔스럽게 철망 주위에서 대기하는 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긴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인간(나)의 속셈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눈이 쌓이고 날씨가 추워졌다. 이제는 놈을 축사 안으로 들어오도록 구체적인 전략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놈이 늘 사료를 먹고 가는 곳의 철망을 놈의 몸이 빠질 정도 크기로 절단했다. 그리고 사료를 안과 밖에 뿌려 놓았다. 밖의 것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계산에서이다.

유인하기 위해 뿌려놓은 사료
유인하기 위해 뿌려놓은 사료 ⓒ 성락

철망을 뚫어 놓은 지 이틀이 지났지만 놈은 좀처럼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야생 습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인지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경계가 만만찮다. 게다가 뚫린 철망 안쪽에 유인용으로 뿌려놓은 사료를 엘크 암놈들이 얄밉게도 집어먹어 버리는 통에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3일째 되는 날, 이번에는 다른 작전을 구사해 보기로 했다. 놈이 으레 그러듯 사료를 먹으러 왔을 때 못 본 체 사료를 뿌려놓지 않고 축사에서 내려와 버렸다. 혹시 사료를 먹고 싶은 마음에 뚫어 놓은 철망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이다.

꽃사슴 몸집 만큼 철망을 뚫었다.
꽃사슴 몸집 만큼 철망을 뚫었다. ⓒ 성락

이 기발한(?) 작전이 과연 성공할까? 다음날 아침, 원주 집에서 농장으로 출발했는데 아버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꽃사슴 들어 왔다."

작전 대성공이다. 놈은 예상한 대로 작게 뚫어놓은 철망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 철망을 들이받으며 약간의 난동을 부렸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안정된 모습이다.

함께 지내는 엘크 암놈들에게는 아직 왕따 신세.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먹이만 충분하다면 이해관계를 따질 줄 모르는, 오직 냄새와 부대낌으로 어울림을 결정하는 동물의 세계이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강원일보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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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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