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은 춤으로 풍성해지는 대한민국 서울. 올해는 특히 한 발레리나의 존재가 새삼 무용애호가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혹은 뜨겁게 만들어줬다. 국립발레단 가을 정기공연은 모던발레의 대표주자 중 한사람인 스페인 마츠 에크의 <카르멘>을 무대에 올렸다.
서울발레씨어터가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세계최초로 모던발레화한 올해는 이어서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등 국내 최고의 발레단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던발레로 가을무대를 장식했다. 이와 함께 이 기회를 통해서 작품보다도 오히려 숨겨져 있던 발레리나에 시선이 모아졌다.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 역을 맡은 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 노보연이 그 주인공이다.
그 자체로 투우의 나라 스페인을 상징할 만한 치렁치렁 레이스가 달린 빨간원피스 차림의 노보연은 카르멘 그 자체로 보였고, 아기 손목 굵기의 시가를 피워대는 모습은 하도 자연스러워 평소에도 저 정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다.
노보연을 일컬어 '카르멘을 통해 백조가 된 무용수'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보연을 잘 모르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 6살부터 발레를 시작한 노보연의 춤인생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특히 한국종합예술학교 재학시절에는 현재 국립발레단 동료인 장운규와 함께 주역을 도맡았다.
대학 재학시절인 99년에는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한국을 빛낸 발레스타'에 참가하여 당시 국내외 발레단에서 스타로 활약하고 있는 프로 무용수들과 함께 공연했다.
2001년 졸업과 함께 국립발레단에 안착했고 이후 국립발레단의 주역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다. 이 정도면 발레를 시작한 모든 사람이 꿈은 꿔도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이다. 그러나 노보연은 대학시절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국립발레단에 먼저 입단한 김주원이란 걸출한 스타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노보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김주원이 워낙 뛰어난 무용수였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대중은 한 사람만을 선택한 듯 보였다.
실제로 노보연은 이 시절을 대단히 어렵게 보내야만 했다고 실토한다. 의지가 더 약해졌거나 방황이 좀 더 깊어졌다면 우리는 아까운 발레리나 하나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립발레단에 박인자 예술감독이 부임하면서 클래식발레가 아닌 컨템포러리 발레에 대한 과감한 선택으로 노보연은 그 진가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국내 모던발레의 선구자인 서울발레씨어터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한국체대 교수)은 노보연의 연기를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 그는 "노보연은 안무가의 의도를 잘 해석하고 표현했다. 모던발레 안무가라면 누구나 탐내할 무용수다. 모던발레는 보여지는 테크닉보다는 숨겨진 것이 많으며 그로 인해 표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노보연만큼 카르멘을 소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좋은 무용수의 작품을 보는 것은 안무가로서는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평했다.
노보연은 이제 국내 모던발레의 아이콘이 될 듯하다. 카르멘의 1차 오디션을 담당하고, 안무가 마츠 에크가 입국하기 전까지 전체 안무를 지도했던 재독안무가 허용순도 "내가 볼 때 카르멘은 노보연이 적격이었고, 그 점은 안무가와 이견 없이 일치했다. 무엇보다 다행한 것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 관객이 흔쾌히 동의해준 것이다. 물론 노보연의 연기가 그것을 결정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런 노보연의 모던발레 표현력은 곧이어 국립발레단이 가을 무대를 통해 각광받은 허용순 안무의 백 스테이지에 중용되고, 객석의 큰 호응을 얻게 했다. 노보연은 그러나 요즘 다시 몸을 클래식발레에 맞추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지젤> 전막공연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오는 17일 성남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이원국발레단의 공연에 주역 지젤로 등장한다. 모던발레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워낙 자신이 선호하는 역할이기에 변함없는 호연이 기대된다.
모던발레 카르멘으로 일약 무용계 시선을 한몸에 받은 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 노보연씨를 어렵게 만나게 되었다. 워낙 쉴 사이 없이 이어지는 공연과 연습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노보연씨는 저녁을 걸러야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인터뷰는 국립발레단 대연습실에서 진행됐다.
- 먼저 카르멘 역에 대해 호평을 받은 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칭찬해줘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박인자 단장님과 안무가 마츠 에크 그리고 허용순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 우선 가까이서 보니 영화배우들이 울고갈 정도로 미인이라 인터뷰가 잘 될지 걱정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한 끼 먹는 저녁도 거르고 응한 인터뷰인데, 못하시면 손해배상 청구할 거에요(웃음)."
- 정말 하루 한 끼 먹나요? 사실 일반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발레리나들의 몸매 관리입니다. 어떤가요?
"대학시절까지는 먹는 문제가 정말 가장 큰 스트레스였어요. 그때는 아무래도 먹는 욕구가 지금보다 강하잖아요. 그렇지만 사실 몸매관리 때문이 아니라 아침이나 낮에는 먹고 싶어도 잘 먹질 못해요. 배가 차면 몸을 움직이는데 부대끼거든요. 이제는 연습이나 공연 마치고 저녁 한 끼 먹는 데 익숙해졌어요."
- 무대에서 굵은 시가를 잘 피우던데, 흡연은 어느정도 하나요?
"(입을 가리고 깔깔 웃는다) 저 담배 못 피워요. 사실 연습 때도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진짜로 시가를 피워야 했거든요. 이번 공연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담배였어요. 지금도 목이 따끔거린다니까요?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연기에 몰입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마실 때가 있죠. 기침은 나오는데 할 수도 없고… 그 심정 모르실 거에요."
- 전 안 피우는 게 힘듭니다.(웃음) 카르멘을 마친 소감을 들려주시죠.
"박인자 단장님이 카르멘을 가져오기까지 굉장히 고심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 관객들이 클래식발레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해설이 있는 발레에서도 세미모던 정도만 하게 되고요. 개인적으로는 클래식 레퍼토리는 어느정도 갖췄으니까 세계적 경향에 맞춰서 모던발레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관객들도 다양한 발레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좋을테고요. 무용수 입장에서는 연기의 폭을 넓힐 수 있어 더욱 좋죠."
- <카르멘>에서 어떤 대목이 가장 인상에 남나요?
"플라워 송(Flower song) 2인무 부분인데요. 사랑하는 감정으로 추는 춤인데도 저는 어쩐지 굉장히 슬퍼서 남들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전 눈물을 참으려고 무지 힘들었죠. 그리고 이번 카르멘에서는 제가 남자들 들어올리는데 그 이후 '힘 하면 노보연'이라고 놀림 당하고 있어요."
- 힘이요? 겉으로 봐서는 종이 한 장도 못들 것 같은데요?
"저 약해보이죠? 하지만 강해요. 그런데 이 말은 쓰지 말아주세요."
- 아니요. 쓰는 걸 독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건 그렇고 다음 질문으로, 카르멘을 통해 진가를 발휘했는데 그런 외부적 변화 말고도 보연씨 내면에도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잠시 망설이다) 맞아요. 카르멘을 통해 의지라던가 집념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가치를 깨달았어요. 한 때 방황하고, 흔들렸던 때가 아깝게 느껴지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후회도 하게 됐죠. 이제는 제가 뭘 해도 자신있게 해낼 수 있어요. 그게 제일 크게 얻은 거죠."
- 원래 계획보다 하루 더 무대에 섰죠?
"네, 일본에서 온 쿠사카리 타미오씨가 몸이 안좋아서 제가 대신 27일 무대에 섰죠. 멀리서 오셨는데 안됐어요."
- 음, 그만큼 안무가의 노보연씨에 대한 신뢰가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전 사실 시연회만 하고 공연에는 나가지 못해도 좋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3회만 무대에 서게 돼서 저도 깜짝 놀랐죠."
- 3회 공연이 사실 쉽지 않은 일인데, 이제 공연이 끝나서 살 맛 나겠어요?
"아니요. 오히려 공연할 때가 살 맛이 나죠. 공연이 끝나고는 허무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지금은 다시 살 맛을 찾아서 연습 중이에요."
- 다른 공연이 있나요?
"네. 11월 17일에 성남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지젤을 연기하게 되요. 많이들 오셨으면 좋겠어요. 국공립이 아닌 개인무용단 공연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주셔야 우리 무용계가 발전을 할 수 있잖아요."
- 네. 그렇죠. 끝으로 향후 계획을 듣고 싶네요. 발레라는 직업이 현역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으니까요. 이제 노보연씨도 미래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데요.
"무용수로서 신분을 정리하게 되면 어느쪽이건 공부를 할 계획이에요. 안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수도 있을 거에요. 아직은 구체적으로결정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신중하게 고민해서 선택하게 되겠죠. 꼭 발레가 아니더라도 춤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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