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유배는 죄의 중과에 따라 유배지가 정해지는 형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죄가 무거우면 한양(서울)에서 가장 먼 변방이 유배지로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유배지로 가장 많이 선택되었던 곳이 북쪽으로는 함경도 경원, 남쪽으로는 서남해안의 인근 섬이었다. 왕이 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죄의 무게에 따라 3천리, 2500리 등의 거리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던 것을 보면 왕조시대의 형벌에 대한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제주도는 사형을 겨우 면한 중죄인이 가는 곳으로 배를 타고 유배를 떠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고 가는 길이었으니 그 힘든 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결정된 곳 중에 섬이 가장 많은 것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삶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하고자 했던 것으로 시대를 떠나서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형벌인가를 알 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 나오는 주인공 카츄사가 유형의 땅 시베리아로 떠나는 장면은 소설과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와 같은 유배형은 오늘날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면 이제 유배는 영원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러나 유배는 지금도 현대적인 개념으로 계속되고 있다. 국외로의 '망명'과 '도피', 혹은 국내 모처로의 '은둔', '칩거' 등이 현대판 유배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한 전직 대통령이 산사에 머물렀던 건 대표적인 현대판 유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배는 때론 불후의 문학적, 학문적 업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 연구가 그렇고 많은 정치가들이 유배지에서 남긴 시문학이 그렇다. 고산 윤선도도 역설적이게도 유배지와 은둔지에서 문학과 조형자연의 원림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인간이 고독한 자신과 어떻게 생산적으로 싸우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아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화와 붕당정치의 결과
조선시대의 유배는 건국 초기의 정권창출 시기에 많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16세기 사림정치 이후 사화와 붕당정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이 나타나는 형벌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더라도 정치적 논쟁과 사화의 뒤끝에 나타난 판결은 대부분 유배형이다. 이 때문에 정치적 회오리 속에 살다간 사람일수록 유배가 일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고산 윤선도도 사화와 붕당정치 속에서 유배로 점철되는 생을 살다간다. 당시 윤선도는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해 있었는데, 남인은 효종 때를 비롯해 몇 차례 집권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야당에 머물렀다.
고산이 정치적으로 유배라는 형벌을 처음 맞이한 계기는 29세(1616년)에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올린 탄핵상소인 '병진소(丙辰疏)'였다. 당시 고산은 광해군의 집권파인 이이첨 일파의 난정(亂政)을 맹렬하게, 그리고 아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온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고산의 삶은 이때부터 유배와 은둔이 일상화된 생활로 접어드는데 그가 제일 처음 유배를 떠난 곳은 함경도 경원이었다. 이후 경상도 영덕, 기장과 전라도 광양을 비롯해 은둔지인 보길도에서 살았다. 유배로 점철된 고산의 적거지(謫居地適)는 전국이 된다. 한 사람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유배가 아니고서는 겪어보기 어려운 전국구 생활이다. 이 때문인지 고산의 유배생활을 통해 당시 조선사회를 살펴볼 수 있는데 유배지에서 형성된 가족생활, 토지소유의 관계에 대한 것 등이 그런 것들이다.
고산은 '병진소'로 30세인 1617년(광해군 9년) 1월 9일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지가 결정되어 압송되고 아버지 윤유기(관찰공)도 일종의 연좌법에 따라 관직에서 삭탈된다. 고산은 유배가 결정된 다음달인 2월에야 경원 유배지에 닿았다고 한다. 유배지에 도착하는 데만 한 달 가까이 걸린 셈이다. 고산의 유배생활은 이때부터 문학 창작의 시간으로 연결되는데 그가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오른 것도 유배라는 시간이 가져다 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한글시조 <견회요 5수>,<우후요 1수> 등 6수를 비롯하여 한문시 43수 등 많은 작품을 남긴다.
고산은 약 1년 만에 함경도 경원에서 경상도 기장으로 다시 옮겨진다. 이후 경상도 기장에서 6년 4개월간을 살아 첫 번째 유배생활은 대부분 기장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연보를 보면 고산의 나이 32세인 1619년 4월 28일 3남 예미(禮美)를 낳았다고 나온다.
당시 유배 생활 중의 가족생활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고산이 3남인 예미를 낳았다는 것에서 이 당시 가족(부인)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34세에는 '납전해배(納錢解配, 돈을 내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남)를 위해 동생 선양이 찾아왔으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의 만남이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산이 첫 번째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36세인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사면이 내려지고 나서였다. 이후 고산은 관직에 올랐고 43세에는 봉림대군(뒷날 효종)의 스승이 되는 등 정치적,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산은 51세인 1638년 6월 경상도 영덕으로 두 번째 유배를 떠난다. 병자호란의 난리 통에 임금을 제대로 호위하지 않고 배알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때는 과오가 그리 크지 않았던지 1년이 채 안되어 52세인 1639년(인조 17년) 2월 풀려났다.
말년의 유배생활
고산은 73세인 1660년(현종 1년) 세 번째 유배를 떠났다. 지금 기준으로도 고령에 속하는 73세에 유배를 떠나야 했으니 당시에는 유배 결정에서 나이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정치적 위상 때문인지 고산의 유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상소가 오가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이후 유배지에 있던 고산의 석방과 이배(移配)를 놓고 또 한 차례 논란이 벌어진다. 고산이 78세가 되던 1665년(현종 6년) 2월 21일 유학 성대경이 고산을 석방해야 한다고 상소한 뒤, 2월 25일 이배 장소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그달 27일 고산의 유배지는 광양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차례 논란이 벌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고산의 이배과정에서 벌어진 예우문제 때문이었다.
고산은 그해 4월 함경도 삼수에서 출발하여 광양으로 이배되는데, 함경도 수령 중에 노비 40여명과 말 20여필을 제공하고 가마꾼들을 각 접경지역에 대기시켜 기다리도록 연로(沿路)에 통지를 한 이가 있었고 그 당시 각 고을 수령들이 고산 대접하기를 봉명 사신의 행차를 모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간 김만기 등이 이를 고하자 왕은 이배할 때 각 고을수령들이 법을 어기고 지나치게 대접했다하여 처벌을 구했고 속전(벌과금)을 받도록 한다.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상당한 비중이 있었던 고산에게 지방의 수령들이 전관예우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지나쳐 언론의 뭇매를 맞았던 모양이다.
고산은 80세에 3번째 유배에서 풀려났다. 지금도 80세까지 살기가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고산은 매우 장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배라는 상황이 인간에게 극한적인 환경에서 더 살아남을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산은 인생의 말년까지 유배지에서 보내면서도 수많은 문학작품과 문화유산의 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