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날 생각나는 옛 추억의 몇 가지들이 있다. 두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호빵, 학교 앞에서 달달한 맛을 느끼게 하던 달고나, 귀마개와 벙어리 장갑 등. 겨울날에는 유독 떠오르는 것들은 흘러간 추억의 것들이다.
예전에 달고나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침을 발라 문질러 하나 더 뽑기에 성공하리라 다짐하면서 천천히 달고나를 먹던 그 맛. 그것들은 이상하게도 머리보다 눈과 귀가 먼저 알고 그보다도 마음이 먼저 안다.
지금도 문득 추억의 단상 한 조각이 떠오를 때면 빙그레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잠깐이나마 옛 추억에 묻혀 순순했던 그 시절에 행복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추억이라는 것은 평생 힘을 주는 또 하나의 '나'이자 '동반자'가 아닐까.
그런 뮤지컬 한편이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 바로 송승환이 제작하는 뮤지컬 <달고나>. 특히 이 작품은 국내 뮤지컬 계에서 드물게 창작 뮤지컬이면서 동시에 소극장에서 초연을 시작해 대극장으로 옮긴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초연에 이어 올해 대학로 소극장에서도 5개월간 공연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엔 소극장 뮤지컬을 충무아트홀 대극장으로 옮겨왔다. PMC프로덕션 대표이자 연극배우인 송승환씨가 직접 연출을 맡은 것도 이전 공연과 다른 점이다. 소극장용 국내 창작 뮤지컬은 꽤 있었지만 대극장에서 공연될 만큼 규모가 큰 뮤지컬은 `명성황후` 이후 드물었던 것이 사실. 이번 무대의 전환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70∼80년 대 음악과 함께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 뮤지컬은 어린 시절의 향수와 추억에 얽힌 사랑이야기를 끄집어 낸 작품이다. 옛 흘러간 음악에 젖어, 이야기에 젖어 편하게 웃고 울며 감동을 한아름 가져가면 되는 작품인 만큼 언제든지 극장을 찾으면 훈훈함을 느낄 수 있다.
담배 가게 아가씨와 이등병 편지의 추억
이 작품은 보고있노라면 옛 추억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부족한 것은 많지만 사랑이 있고, 정이 있어 따뜻했던 그 시절을 자연스럽게 노래에 맞춰 연기자들이 풀어 가는 뮤지컬이라 할 수 있다.
제작진들이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실험적이고 작품성을 내세우는 창작 뮤지컬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용이 TV드라마 시대극을 보는 것은 같은 인상을 풍기기는 하지만 그들은 '추억을 뮤지컬로!'라는 모토에 꼭 맞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추억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 속에 슬픔도, 비애도, 절망도 있다. 하지만 추억이라는 것은 왠지 모르는 아련함을 느끼는 공통의 느낌이 있듯, 이 작품의 내용도 즐거운 추억이야기 만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더 공감이 간다.
흘러간 추억의 노래를 틀어 놓고, 배우들이 노래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잘 짜여진 극본에 따라 배우들은 숨쉬며 노래하고 열정을 불사른다. 그것은 노래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우리를 감동시킨다.
내용은 한 방송국 PD의 추억 여행이다. 인터넷 방송국 ‘달고나’의 PD 세우. 그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40대의 남성이다. 꿈도 희망도 잃어버리고 산 지 오래며, 열정도 사랑도 먼 나라 이야기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구식 이벌 타자기에 얽힌 순수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는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지희가 보낸 편지. 그때부터 그의 추억 여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추억 여행으로부터 다시금 삶의 열정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들은 이별했기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추억에 관한 뮤지컬은 흘러간 가요를 들으며 아련함을 느끼듯, 슬픈 추억도 아련함과 함께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아주 소박한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흘러간 가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노래가 그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던 곡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소박하지만 단순한 내용을 빛나는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극복해 냈다.
새롭게 변신한 무대와 연출
이 작품은 소극장에서 공연됐던 만큼 작품의 구조는 소극장에 어울리도록 연출되었다. 무대는 그만큼 소박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어느 대형극장에 손색이 없었다. 예를 들어 스무 살이 된 지희의 풋풋한 대학생활로 시간을 옮긴 무대는 특별한 무대장치의 변동 없이 몇 조각의 천과 타자기 하나로 대신했다.
무대장치 또한 완벽하게 재현했다. 70∼80년대를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장치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골목길에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등불. 오목한 장독대와 햇빛에 바삭하게 말라 가는 이불 홑청. 익숙한 시멘트 담벼락까지.
그러나 이것이 대형극장으로 옮기면서 작품의 규모가 커진 만큼 무대와 그의 장치도 화려해졌다. 화려해졌지만 여전히 작품의 소박함을 잘 전달하고 있다.
배우들이 동선이 긴 안무를 선보이거나, 솔로 곡도 여러 명의 코러스 뒷받침해 주어 좀 더 강렬한 무대를 연출했다. 이것은 기존 뮤지컬이 1인 소화해냈던 것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함께 소화해내 더욱더 극적인 장면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무대 세트도 1세트만 사용하고 천을 이용해 공간저인 변화를 주었던 것과 달리 8세트를 사용하고 다양한 공간적인 변화를 이뤄내며 대형극장답게 스케일의 규모도 눈에 띌 정도로 바뀌었다.
다행히도 이러한 무대장치들은 하나 같이 규모만 커졌을 뿐 소극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소박한 우리네 추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여전하다. 무대가 3배나 커졌지만 추억의 골목길과 가로등, 옥상이 있는 낡은 집 등 공간은 여전히 정겹고 따뜻하다.
오히려 작품은 소극장에서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규모가 커짐에 따라 입체적인 구조로 변화해 한층 더 높아진 관객들을 만족시키는데 충분했다.
새로운 연기자들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대형무대로 옮기면서 기존 연기자 세우와 지희역으로 정의욱, 김선미 외에 탤런트 박형준과 인기가수 그룹 `쥬얼리`의 멤버 조민아가 가세했다. 기존 연기자들의 연기는 이미 완벽한 세우와 지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
그렇다면 이번에 가세한 박형준과 조민아의 연기는 어떨까? 이들도 100% 세우와 지희의 모습이었다. 이미 여러 드라마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형준은 자신의 연배와 비슷한 나이를 연기하기 때문인지, 드라마에서 보여준 연기보다 더욱더 자연스럽게 숨쉬고 있었다.
또한 세월을 뛰어넘어 학창시절을 연기하는 부담이 없지 않았을 테지만 그가 연기한 어린 시절은 과장되지 않았고, 제 나이를 잊은 듯 활기 넘치는 얄개 모습 그대로를 선보였다. 그리고 뮤지컬인 만큼 노래 실력으로 뽐내야 했는데, 이미 노래를 잘 부르는 연기자로 소문났던 실력을 유감없이 펼치며, 뮤지컬 계의 신인연기자가 나온 듯한 인상마저 느끼게 한다.
또한 쥬얼리 출신 조민아는 연기도 처음인 초보 연기자인만큼 피나는 노력을 한 듯 보인다. 아직까지는 무대에서의 유연함은 부족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자신만의 지희를 만들어 가는 진행형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쥬얼리는 무대에서 라이브로 소화해냈던 적보다 립싱크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과연 그 큰 무대를 압도하는 노래 실력을 뽐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그녀는 평소 쥬얼리에서 큰 인지도를 갖추지 못해 발군의 실력을 뽐내지 못했을 뿐, 그녀가 부른 노래는 한편의 명장면으로 탄생할 만큼 대단했다. 또한 초보 신인연기자 답지 않게 상대 박준형과 찰떡궁합 호흡을 보이며 전혀 위축되지 않은 연기를 보여 극중 세우와 지희의 로맨스를 애틋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삼촌 역으로 등장하는 코미디언 출신 손헌수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만큼 그의 실력은 여느 연기자 못지 않았다. 또한 극중에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신만의 연기를 보였다. 그리고 코미디언이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 연기자로의 진지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처럼 이번 공연에서 연기자들의 몫은 대단했다. 감독이 그들을 택한 것에 대해 적잖은 우려도 있었지만 충분한 연습을 통해 각자 맡은 배역에 완벽하게 변신을 꾀하며 작품 속의 세우와 지희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밖에 소극장에서 보여주었던 추억의 집중하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장르 변신도 꾀한 듯 보인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세우와 지희의 첫사랑 이야기에 보다 초점이 맞춰진 듯 그들의 사랑을 많은 시간을 할애해 보여주었다.
또한 추억의 곡을 통기타, 아카펠라, 하모니카 등으로 다양하게 연주되면서 보는 내내 지루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특히, 이번 공연은 대형극장이라는 첫 번째 시도인 만큼 성공여부가 중요하지만 흥행 성적과는 별도로 작품으로서는 올해 겨울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