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땅이 만나는 영원의 길, 신라의 푸른 길, 작가 윤대녕은 7번 국도를 그렇게 불렀다. 강릉에 태를 묻은 시인 박용하는 7번 국도라는 시에서 이 길을 영혼의 길이자 내면의 길이라고 노래했다. 그런 만큼 이 길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늦가을에서 본격적인 겨울의 중간으로 진입하는 11월, 나릿가의 바람은 오슬오슬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소름은 피부가 만들어 놓는 돌기의 표면적 줄이기로 인한 방어체계이지만, 그것을 피부의 꽃이라 한다면 너무 억지가 될 것인가. 그렇거나 말거나 어쨌든 그 옛날 수로부인이 걸었던 이 길은 무진장한 꽃이 피고지고, 피고지는 훈향(薰香)의 길이자, 열락(悅樂)의 길이었으며, 상사(想思)의 길이었다. 때는 신라 33대 성덕왕 시절, 강릉태수로 부임하게 된 남편 순정공(純貞公)과 동행하게 된 수로부인(水路婦人)이 경주에서부터 강릉까지 걷던 길.
요샛말로 '미스신라'라고나 해야 할 미모와 지성, 품위를 완벽히 갈무리한 수로부인의 걸음을 따라가는 이 길에서는 스님이 파계를 하고, 신물이라는 바다의 용까지 수로부인을 납치했다가 풀어주는 등 그야말로 산천초목조차 법석을 떨어대었던 모양이다.
"붉은 바위가에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 한다면 저 꽃을 꺽어 바치겠나이다"라는 헌화가(獻花歌)의 가사를 보거나 당시의 상황, 신라라는 시대적 분위기 등을 고려할 때, 수로부인이 단순히 한 지아비의 조신한 아낙으로 남아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헌화가는 수로부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드무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고, 이 7번 국도는 다시없는 영화촬영지였던 셈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신라인의 대표 유부녀이자 영원한 애인이었던 수로부인을 닮은 어떤 여인을 동해까지 가는 버스에서 우연히 맞닥트리게 되면서 시작한다. 이리하여 주인공의 귀에는 헌화가의 리듬이 환청같이 리바이벌 되고, 수로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절벽을 기어올라 꽃을 꺾는 어느 촌로의 열정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길은 언제나 환상과 행복만이 놓여진 것은 아니다. 그 길에는 삐걱거리는 부인과의 사이로 괴로워하는 잡지사의 월급쟁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공사를 다니는 청렴하고 탄탄한 남편을 두었지만, 어딘가 허전한 한 음악선생의 여정이 실려 있다. 작가 윤대녕의 시선에서는 조금 어슷하게 빗나가 있지만, 조금 더 확장해보자면 창밖으로 보이는 포구의 아름다운 수평선 아래로는 산다는 것의 지겨운 악머구리가 끊임없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병풍 속의 여인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 냄새를
맡으며 감자꽃, 도라지꽃 하는 말들을 허황하게 읖조리고 있었다."
이제 당신이 사는 자리가 당신의 품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파트만은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차들도 고품격의 외양에다 첨단 기능들을 탑재한 채 그에 걸맞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런 차들을 맞기 위해 길들은 또 그 만큼의 새 단장을 하고 있다. 7번 국도도 많은 부분이 자동차전용도로나 고속도로란 이름으로 신속하게 고속화되어 그 옛날 어슬렁거리는 소의 한나절 걸음길이 한가치 담배길이보다 짧아지고 있는 터였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고, 빠르게 지나가서 모든 감정들도 빠르게 진화되고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점차로 고속화되는 길 위에서 문득, 무엇이 얼마나 빨라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 전, 지루한 일상을 깨고 약동하는 핏톨을 타고 흐르던 본능과 열정의 갈애에서 우리는 얼마나 빠르고 멀리 그곳을 떠나 왔던가. 그러한 미개와 비문화의 찌꺼기를 홰홰 내던지고, 얼마나 명징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직선화된 길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직선이 단지 수학적 상상 속에서나 있는 것처럼, 나로서는 우리네 삶이 천년 전, 만 년 전의 그 지점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 있다는 혐의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길들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어데로 가라는 푸른 신호등이란 말인가. 그러한 와중에서 같은 버스의 같은 의자를 나눠 탄 두 주인공의 마음은 여러 군데서 합해지고 갈라지는 수많은 길 위에서 또 한번 갈라지고 합해진다. 그 여러 결의 길 옆으로는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해안선이 끝없이 출렁거린다. 소설 속 묘사처럼 코발트빛에서 연둣빛 사이를 그야말로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소설은 끝내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 보이지 못하고, 용에 납치됐던 수로부인을 부러워하지만 제대로 된 작별인사마저 나누지 못한 채 이별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 속에서 빛나던 바닷물 한 방울처럼, 서로의 가슴에는 뜨겁고 애잔한 꽃 한송이가 전해졌음을 지금 사납게 불어대는 바람이 알려주는 느낌이다.
천년 전, 아니 그 오래전 이 길을 걸었을 모든 이들은 어디에 당도해 있을까. 그 도착점을 알지 못하는 뭇사람들이 끝없는 행로가 저 파도의 관성을 닮았다. 삼척을 지나는 7번 국도 옆으로 '아시아 하이웨이'란 팻말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렇게 세계 자체가 지형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일 게다. 그렇지만, 이 길을 왕복하는 종래의 심정은 어찌 편안치 않은 것일까. 길은 펼쳐져 있으되 결국은 혼자, 자신의 걸음으로 가야하는 고래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연유에서 비롯한 까닭은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강원도 세상이란 웹진에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