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따뜻한 초겨울의 햇살에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지는 22일 오후 2시, 그 은행잎들을 밟으며 전주종합운동장 네거리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농민 1만여 명과 노동자 3천여 명, 학생 1천여 명과 시민 등 1만 5천여 명이 '한미FTA 저지를 위한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 특히 전농 전북도연맹은 14개 시군 각지에서 200여대 버스를 타고 집회에 참석, 6.10 항쟁이후 이렇게 많은 농민들이 모인 건 처음이었다.
"1894년 수천의 농민들이 전주성에 입성한 그날처럼 우리는 여기 모였습니다.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부모와 처자식을 고향에 남겨두고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희망으로 입성했던 것입니다. 그 발걸음이 오늘 우리들의 희망입니다."(전농전북도연맹의장 이광석 - '한미FTA 저지 범국민총궐기 전북대회'에서 전북농민을 대표한 연설)
전북대회는 노동자와 농민, 학생과 참가단체 대표자들의 지지 연설과 문화공연으로 채워졌다. 2시간의 집회가 마무리되고 보도행진을 할 즈음에는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전주종합경기장에서 전북도청까지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집중호우로 불어난 거대한 급류처럼 참가자들은 8차선 대로를 흐르고 있었다. 그 인파의 물결 속에서 한 늙은 농부를 만났다.
"여기에 살라고 나왔지. 더 이상 못 살겠어. 한 해 걸러 배추나 수박밭을 갈아엎어야 하고 빚은 늘어만 가는데 쌀과 소까지 죄다 개방 허믄 어떻게 살라고 그려."(이필례 70세 고창)
소속 농민회와 노동자들이 한 대오씩 출발한 저항의 물결, 전주빙상경기장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4Km 시가행진을 1.5Km 시위대열로 오후 5시 30분경 도청에 집결했다. 그 시각 도청에는 수 겹으로 방어막을 쌓은 경찰병력 2천여 명이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도지사와의 면담을 강행하려는 몸싸움은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백골단까지 동원한 경찰병력을 뚫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연행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백골단 옆에 한 농부가 서 있었다. 백발이 할머니의 손에는 작은 촛불과 '한미 FTA 반대' 구호피켓이 들려 있었다. 백발의 할머니와 헬멧을 쓴 백골단의 모습은 마치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마침 그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전 공무원으로 은퇴를 하고 김제에서 안 짓는 것이 없을 만큼 여러 가지 밭농사를 짓고 있어요. 농부가 되어서야 농민의 심정을 알겠어요. 두 딸이 미국에 살아서 올 여름에 미국에 다녀왔는데 딸들이 한국처럼 좋은 국민의료보험이 없다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이 맹장수술을 하려면 천만 원이래요. 그런데 재미난 것은 미국 사람들 30%가 보험이 없대요. 한미 FTA가 체결이 되면 한국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 이것을 막지 못하면 우리 동네 사람들 대부분 의료보험 없이 살아가야 할 판인데, 어떻게 집에만 있을 수 있어요."(황점희 65세 김제)
한미 FTA는 대학생들까지 집회장으로 불러 모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와 민족과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는 관심이 없고,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열에 앉아서 촛불을 들고 있는 한 여대생을 만났다.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정책을 반대하러 나왔어요. 저희 대학생들 대부분은 어렵게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한국에 진출할 미국대학 등록금이 한 해 2천만 원이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립대학들도 천정부지로 등록금이 오르지 않겠어요? 서민들이 대학 가기는 더 어렵게 될 것이고요. 그래서 저희들은 교육개방 절대 원치 않아요. 빈익빈부익부의 사회구조를 더욱 고착화시킬 게 눈에 보이거든요."(장주희 전주교대 사회학과 2년)
도민 앞에서 '한미FTA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한 집권당 소속 김완주 도지사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전북도의회 부의장이 도지사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지난 20일 농민회 전북도연맹과의 면담에서 밝힌 "선대책 후체결"이라는 입장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농업 중심의 전북도민들의 민심을 헤아려주길 바라는 기대에 그는 아쉬움만 남긴 꼴이었다.
도청광장에 온기를 전하던 햇살도 사라지고, 인도에서 집회를 마감한 농민들이 쪼그리고 앉은 채 다 식은 밥에 막걸리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순간 지구 반대편 호주에서 여름 함박눈이 쏟아졌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식량이 무기가 될 것이라는 경보이리라. 소비와 경쟁, 완전개방과 자유무역만이 살 길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전령사 FTA는 그렇듯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 생태계를 공멸로 몰아갈 것이다.
동물의 세계는 양육강식의 세계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도 특히 무역관계는 양육강식의 세계이다. 한국의 20배나 되는 미국경제의 규모를 정부는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한 집회 연설자의 예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규모를 동물원으로 비교하면 미국은 호랑이고 한국은 진돗개일 것입니다. 동물원의 미국산 호랑이가 진돗개에게 사이좋게 지내자며 서로 울타리를 치우자고 제안했습니다. 진돗개가 미치지 않았다면 자기 울타리를 허물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