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싸움의 현장을 잊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먹고도 매일 한다는 주민촛불문화제도 찾아가지 못했다.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는 현장을 지켜보며 농민에게 농사짓는 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쟁과 평화 사이에 단 한치에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깊게 파헤쳐진 농토, 넘나들 수 없는 철조망, 공권력의 허락 없인 들어갈 수 없는 나의 고향, 사라진 농민의 생존권,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기지 이를 막는 대추리 주민들의 처절한 싸움은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확고한 한미동맹이라는 명제 아래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저항이 돼 버렸다.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고도 김지태 이장의 구속, 철조망 추가설치, 주민들의 대한 회유와 협박은 알게 모르게 계속 진행되었고, 여전히 대추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5월 4일의 치열한 농민들의 저항은 차츰차츰 우리들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잊지마... 기억해'
그래서였을까. 한 해를 마무리해 가는 시점에서 '잊지마... 기억해! 대추초등학교 운동회'가 팽성대책위 주최로 26일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무너진 학교터는 그대로였지만 며칠 전부터 주민들과 평택지킴이들이 운동회를 열기 위해 운동장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한 덕분에 운동회를 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시작과 더불어 한 편에서는 주민들이 마련한 불판에 돼지고기와 오징어를 구워 먹기도 하고 왁자지껄한 잔칫상이 마련되었다. 운동장에 축구 골대를 세워 놓고 아이들은 공차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처럼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과 함께 한 참가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연날리기, 널뛰기, 줄넘기를 하며 여느 초등학교 운동회 못지않았다.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단위 참가자도 눈에 많이 띄었다.
점심때가 되자 마을회관에서는 점심 준비에 한창이다. 점심이라고 해야 콩나물국에 김치, 인절미가 다였지만 참가자들에게는 어떤 진수성찬보다 푸짐한 상이었다.
점심이 끝나자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마을주민들과 참가자들이 줄을 맞춰서 몸 풀기도 하고 서로 환영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환영인사에 나선 민병대 할아버지는 아까 널뛰기가 시원치 않았는지 첫마디가 "아까 술을 한잔했더니 오늘 널뛰기가 잘 안돼, 좀 있다 다시 할 테니 웃지들 말어"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어 "오늘 우리 무조건 힘차게 노는 겨, 재밌게 놀다 가자구"라고 말하자, 참가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지난날 싸움의 지친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말 안 듣는 것들은 몽둥이가 약"
가장 먼저 박 터뜨리기가 시작되었다. 참가자 저마다 두어 개씩 콩주머니를 들고 던져 보지만 단단한 박은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은 던져서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쳐서 터뜨리는 것이라며 마을 주민들과 참가자들이 박은 몽둥이로 쳐서 터뜨렸다.
"그저 말 안 듣는 것들은 몽둥이가 약"이라는 한 주민의 말에 참가자들 한바탕 웃어 보이며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행사 중간 일본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 국제연대위원회 사무국에서 활동하는 히로사와 코우시는 일본의 나리타공항반대투쟁을 40여 년간 하고 있는 산리즈카마을 주민들이 적어준 깃발을 전달해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히로사와씨는 "지금도 나리타공항 활주로 한복판에서 마을 이루며 생활하고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산리즈카주민들이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투쟁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면서 "자신들의 격려의 마음을 잘 전달하기 위해 이 깃발을 직접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과 참가자들이 서로 발을 묶어 2인 3각 경기를 벌이며 우애를 다졌다. 마을주민을 등에 업고 달리는 서로 모습에서 주민과 참가자는 따로 없었다.
이날 운동회는 그동안의 시름을 잊고 다시금 많은 이들에게 대추리는 여전히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강요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대추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떠난 것이 있다면 그나마 가졌던 정부에 대한 이들의 믿음이다. 또한 혹시 이러다 여기서 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패배감이 떠났을 것이다.
대추리는 그냥 대추리이다. 미군기지도 아니고 전쟁기지도 아니다. 대추리는 그냥 이들의 땅이고 이들이 다시 찾아야 할 땅이다.
요란 법석을 떨며 더는 정부가 이들을 내쫓으려 하지 않길, 그래서 또다시 정면으로 마주치지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란다. 설사 정면으로 마주친다 할지라도 먼저 고개를 떨어뜨리는 쪽은 민심을 읽지 못하는 정부당국과 오만에 빠진 미국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오늘 운동회를 통해서 다시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