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창 너머 내부 공간이 훤히 보이는 혜화동 동사무소. 처마 아래를 걸을 수도 있다. 댓돌은 없지만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할 때 처마는 긴요한 역할을 한다.
ⓒ 박태신
가회동 같은 호젓한 한옥 마을을 가지 않아도 한옥의 정취를 생생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한옥 건물로 사무소를 차린 종로구 혜화동 동사무소가 그곳입니다.

서울의 한옥 마을에서는 간혹 대문이 열려 있는 경우는 제외하고 담 너머로 넌지시 내부를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대문 옆 사랑방의 창문도 닫혀 있기 십상이어서 외관만 두루두루 살펴볼 도리밖에 없지요. 그저 골목길의 정취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간혹 기념관 식으로 개방된 한옥도 있지만 안주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이곳 혜화동 동사무소를 발품삼아서 가보십시오. 'ㄷ'자형의 넓직한 공간의 한옥이, 그 'ㄷ'자형의 터진 곳으로 사람들을 기껍게 맞이할테니까요.

아름드리 은행나무, 고즈넉한 마당

▲ '애기애타(愛己愛他·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 도산 안창호의 글이다. 처마와 처마가 서로 마주보는 'ㄷ'자 형의 한옥에서 현판도 서로 마주보며 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 박태신
▲ 정문 옆의 은행나무가 으스스 떨며 노란 잎을 떨구는 사이 처마도 모서리를 살짝 올리며 기지개를 켠다.
ⓒ 박태신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이 집을 지켜주는 서낭신처럼 대문 안쪽을 차지하고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몸을 흔들흔들 추스려 노란 은행잎을 떨구어 뿌려주곤 합니다.

사무소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마당 한가운데 서서 둘러보십시오. 건물 안쪽은 원래 벽체나 마루나 한지 창이 있어야 할 자리가 전부 유리문과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안쪽의 모습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마당은 징검다리식으로 돌을 깔아 놓았고 그 사이사이에는 조만간 잔디도 깔아놓을 것이라고 하는데, 보통의 동사무소가 일처리만 하고 돌아가게 마련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이 마당부터 거닐고 싶어 잠시 더 머물고 싶을 그런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년 된 향나무가 마당 한곳을 차지하고서 마당 안쪽으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서 멋을 더합니다.

처마 밑에서 올려다 보았는데, 지붕의 용마루 너머, 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새들도 몇 자리 차지하고 있는 감나무가 보기 좋습니다. 동사무소 것이 아닌 옆집 소관의 감나무지만 한옥 동사무소에다 푸근한 정취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새들이 감을 찍어 먹나 기대했는데 사람 눈치를 보았나요, 그저 자리만 차지합니다.

원래 개인 한옥집이던 것을 종로구에서 매입, 3년여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혜화동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동사무소 자리로 마련하여 얼마 전 개청식을 했습니다.

한옥의 크기가 사무소의 필요공간보다 작지만, 사무소 건물로 한옥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곳이 특히 문화지대라 할 수 있는 대학로 옆 혜화동이라는 점에서 동사무소 직원들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한옥 사서 리모델링... 3년만에 개청식

▲ 내부 대청마루가 있을 자리에서 바라본 마당. 창 옆으로, 열차에서 볼 수 있는 기다란 막대 모양의 버튼을 누르면 열리는 자동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내부의 신식공간이 한옥의 외관과 어색하지 않게 공존한다.
ⓒ 박태신
▲ 감나무는 새를 좋아한다. 새도 감을 좋아한다. 앉을 곳이 많고 놀 곳이 많은 한옥도 새는 좋아한다. 어느새 처마 밑에 집을 트는 제비를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 박태신
동사무소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역시 'ㄷ'자형을 따라 복도가 이어집니다. 툇마루가 있을 자리지요. 기둥도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둥은 자연스레 칸과 칸을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원래 방과 방 사이의 벽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그런 벽체를 다 없애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 있습니다.

외부의 기둥에는 보통 한옥집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글귀를 담은 현판을 걸어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든지, '청경우독(晴耕雨讀·갠 날에는 농사를 짓고 비오는 날에는 글공부를 한다)' 등이 있습니다. 전 가옥주가 서체 그대로 모사해 놓은 것이라 합니다.

매월 1일은 동사무소에서 대청소를 실시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청소하고 나서 혜화동 동사무소 직원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주민을 맞이할 거라고 합니다. 멋스러운 일이지요.

번잡한 혜화동 사거리에서 가장 덜 번잡한 거리로 들어서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동사무소를 들를 작정이시라면, 그곳을 구경한 다음 내처 길을 더 가 서울 성곽을 오를 채비까지 해보십시오. 한나절의 나들이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예전에 저는 성북동 쪽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오르고서 이 길 쪽으로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서울 성곽은 호젓한 산책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저와 반대 방향으로 서울성곽을 구경하실 요량이라면 좀더 걸음을 보태서 길상사까지 둘러 보십시오.

혜화동 동장님에게서 박카스도 선사받습니다. 좋은 곳에서 일하시니 좋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멋진 한옥, 멋진 일터를 보고 옵니다. 이런 곳이 다른 곳에도 생겼으면 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잘 어울리는 곳,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는 곳 말입니다. 동장님이 배웅까지 나오시네요.

덧붙이는 글 | 혜화동 동사무소(02-731-051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