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재개를 위해 관련국들의 물밑 접촉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눈에 띄게 유연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잇따라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워싱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최근 부시 행정부는 "한국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고 발언했고, 북한의 핵폐기에 대한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또한 얼마 전까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거부했던 태도를 바꿔 양자대화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점을 대북정책의 변화 근거로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나온 부시 행정부의 발언은 결코 새로운 것이 없다. 기존의 입장을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한 것을 두고 '새로운 인센티브'라고 말하는 것은 오판의 위험성마저 가져올 수 있다.
또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베이징 회동을 가진 것 역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부시 행정부는 줄곧 "6자회담의 맥락에서 양자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해왔고, 이번 베이징 접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2004년에도 2005년에도 '평화협정' 발언
부시 행정부의 최근 발언과 관련해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한층 유연해졌다"거나 "북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인센티브"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한국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만 놓고 볼 때는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평화협정 체결 의사를 최초로 밝힌 시점은 2004년 여름이다. 2004년 6월말 3차 6자회담 직후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제임스 켈리는 미국 의회 증언에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되면 다자회담의 틀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켈리의 뒤를 이은 크리스토퍼 힐 역시 2005년 8월 17일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북한은 우리에게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해왔는데, 우리가 적대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하다면 평화협정 체결을 준비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6자회담 공동성명에는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는 표현이 명시되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평화협정 카드는 북한이 내밀었다
6자회담에서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의제로 삼자고 먼저 제기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북한은 작년 7월 9일 김계관-크리스토퍼 힐 회동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1단계 4차 회담 직전인 7월 2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화체제 구축 필요성을 공식 제기한 바 있다.
이러한 북한의 요구를 접한 미국은 4차 6자회담을 앞두고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 6자회담과 별도의 포럼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을 협의할 의사가 있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평화협정 문제가 6자회담에서 거론된 것은 북한이 원하니까 미국측이 그럴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이는 미국이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하기 위해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인센티브를 먼저 제시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요구한 상응조치 가운데 하나를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핵 해결과 평화협정 체결 사이의 선후 문제를 어떻게 상정하고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평화협정의 체결 조건으로 '북한의 선 핵폐기'를 계속 고수하고 있다. 이는 일단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 북한의 핵실험 및 미국 중간선거에서의 완패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일방적 핵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해왔다.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의 선행조건으로 핵폐기를 고수한다면,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평화협정에 서명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는 것 역시 '립 서비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북한의 핵폐기는 북한이 전적으로 협력하더라도 3년 이내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핵 전문가의 분석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2년 2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폐기를 어느 수준으로 상정하고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의 핵폐기)'를 평화협정 체결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를 북한이 수용할 리 만무하다.
이에 반해 핵폐기를 전제로 한 '핵동결' 시기나 '핵폐기' 진행 과정에서 평화협정 상정하고 있다면, 이는 대북정책의 중대한 변화를 의미하며, 줄곧 '동시 행동'을 요구해온 북한과의 접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이러한 입장 변화의 징후를 보인 적은 없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볼 때,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특히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
결국 평화협정과 북핵 폐기의 선후 문제를 풀어야 할 몫은 한국에 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방향은 '동시 행동'에 있다. 즉 '먼저 핵을 폐기하라'는 미국 측 입장과 '그럴 수 없다'는 북한의 입장을 절충해, 핵폐기와 평화협정 체결이 동시적으로 병행할 수 있도록 북미 양측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차기 6자회담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평화협정 협상을 개시하고, 북한의 핵폐기 조치가 상당 부분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완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평화협정 체결은 북핵 문제 해결의 중요한 수단이자 목표이다.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 갈등의 재발은 한반도 정전 체제의 불안정성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이는 반대로 '북핵 위기를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의 계기로 삼지 않으면 또다시 위기 상황이 재발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평화체제 구축은 북핵 문제 해결의 중요한 수단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 '전쟁 위기'가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반세기를 훌쩍 넘긴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