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국악인들이 가진 고민이자 희망은 동시대와의 교감이다. 국악 이전에 음악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하여 찻집에서건 방송에서건 일상에서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것이면서 우리 것이 되고자 열망해야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는 근현대사를 통해서 전통음악은 외래음악에 안방을 내어주고 변방의 자리에서 신음해 온 까닭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20세기 국악은 보존과 계승의 화두만으로 자족하였지만, 새로운 세기와 대면하는 국악은 지난 세기에 잠재워진 음악적인 요구와 당위에 자극받고 있다.
20세기 후반을 거세게 휘몰아친 퓨전국악의 열기는 근래 들어 호흡을 고르며 성숙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막연히 대중화라는 명제에 함몰되기보다는 국악과 양악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조화와 변화를 꾀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지난달 28일 예술의전당 근처의 작은 극장 DS홀에서 '여창가곡과 현대음악의 만남'을 주제로 개인 발표회를 연 젊은 여창가객 이아미에게서 그런 흐름 속의 한 동력으로 볼 수 있다. 곧 서른이 되는 젊은 가객 이아미는 올 초 한국문화예수위원회 신진예술가로 선정되어 이 날 공연을 열게 되었다.
가곡 이수자이며 동아콩쿨 정가부문 금상을 받기도 한 이아미의 프로필에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고리짝부터 뒤지지 않고 가까운 2, 3년의 족적에는 일반 음악 연주보다는 연극이나 무용에서의 이아미가 더 많이 보여진다는 점이다.
11월만 해도 자신의 개인발표회 전에 캐나다 아트마켓에 다악 프로그램으로 참가하여 다동의 역할과 가객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주하고, 한불 무용고수들의 공연인 김매자, 카롤린 칼송의 ‘느린달’에서 가곡 우락을 불렀다.
이아미가 종사하는 ‘정가’라는 장르는 국내 비주류 장르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종목에 속한다. 국악 관련 국공립단체도 많건만 도대체 국악원 말고는 정가하는 단원을 모집하는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조차 언제 한참 전의 일이다.정가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할 사람이 길가는 사람 열 중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것이 비단 이아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주어진 환경을 뚫고 나가려는 진지한 의지와 유효한 성과는 구별되기 마련이다. 앞서 거론한 데로 많은 청춘국악도들은 퓨전을 선택했고, 그로 인한 일부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독특한 음악이며 동시에 정신활동인 정가라는 특성은 여간 해서는 퓨전과 손잡지 못하는 것 같다.
전통가곡이 아닌 다른 음악과 크로스오버를 추구한 다른 경우를 보아도 한결같이 현대음악과 만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강권순, 문현 등 중견에 속할 가객들이 현대가곡, 현대시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놓았고 이아미가 그들보다 조금 뒤편에 서 있는 것이다.
이아미가 처음 현대(컨템포러리) 가곡을 무대에서 부른 것은 5년 전인 2001년 이만방 작곡의 <악장I>을 부르기 위해서지만 현대음악과의 인연은 상당히 길다. 현대음악계의 거목 이만방은 그녀의 부친인 까닭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현대음악을 접하고 자란 것이다. 어쩌면 현재 국악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현대음악에 눈을 뜬 장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비록 자신이 인지한 것은 물론 한참이 지나 대학시절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정가와 현대음악의 만남은 크로스오버라는 점에서 여느 퓨전국악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미세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일반 퓨전은 은근히 저명성에 기대는 효과를 보고자 한다. 예컨대 유명 클래식소품, 팝 등을 국악으로 끌어들이는 것들이 그렇다. 그러나 정가나 현대음악이나 대중에게 낯설기는 다를 바 없기에 현대가곡의 시도는 일단 대중성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느린달’ 프랑스 공연을 위해 2일 출국을 앞두고 바쁜 이아미를 1일 국악원 근처 찻집에서 만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부를 때면 영락없이 황진이를 떠올리게 하는 미인이다. 몇 년을 보고 지냈어도 막상 차 한 잔이라도 앞에 두고 앉기는 처음이라 적이 어색한 면도 있어 차 반 잔을 말없이 마셨다가 운을 떼었다. 왜 현대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을 풀어낸다.
정가라는 것이 국악 외의 방법을 통해서도 음악의 섬세한 미학을 전달할 수 있는 상당히 폭넓은 음악적 프리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6살 때 부친 손에 이끌려 정가를 배웠고, 까맣게 잊고 살다가 문득 중학교 3학년 때 국악고등학교를 가고 싶었고, 또다시 대학 졸업 즈음에 현대음악을 통한 가능성과 매력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봐도 자신이 왜 국악고등학교를 가서 가곡을 전공하게 됐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작곡가인 부친을 두고도 단 한 번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놀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살그머니 웃음을 찻잔에 떨어뜨리며 말을 한다.
"현대음악이 특별히 어렵거나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만 듣는 이를 생각하게 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 생각하는데, 잘된 현대음악에는 아주 평화롭거나 혹은 몹시 괴롭게 만들어 음악을 들은 후에 어떤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현대음악의 규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아미의 대답 속에는 자신의 관심장르에 대한 속 깊은 고민과 탐닉이 있었음을 드러내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인 아버지를 두어 좋겠다고 묻자 오히려 고개를 외로 꼰다. 부모가 음악을 모르면 무조건 밖에서 잘하고, 고생하고 온다고 궁둥이라도 두들겨 줄 텐데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 또한 음악 전문가 버금가는 분이라서 무대보다 집이 더 긴장된다고 엄살을 부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청중이 부모님이에요. 잘한다는 말보다 더 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살아요"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연주 리허설 때 보인 모습에는 부녀지간의 깊은 사랑과 같은 음악의 길을 가는 동행으로서의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부녀가 모두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한 척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그것도 잠시 이제 본격 독주회를 통해 현대음악에 대한 꼼짝하지 못할 커밍아웃을 했으니 부친도 더는 '알아서 하겠지'라고는 못할 것이다. 언제라고 못박을 수는 없으나 부녀가 함께 만드는 현대가곡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곡 전바탕 25곡 중, 느린데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좋은 이수대엽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아미는 으레 인터뷰가 그렇듯이 미래 계획에 대해서 묻자 잠시 말문을 닫았다. 이윽고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가하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해요. 미래는 우리들에게 희망보다는 좌절을 각오케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해야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정가이고 그 먼 여정이 저를 지탱하는 힘이에요."
감정을 덜어내고 담백하게 말하는데도 그 속을 잘 아는지라 듣는 가슴이 메케해진다. 정가 시작한 후로 다른 것은 생각해본 적 없고, 인생에 대한 가정의 습성은 없다는 곧 서른의 여창가객 이아미는 나이보다 훨씬 더 깊고 성숙해 보였다.